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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I Believe

(나는 무엇을 믿는가)


by Leo Tolstoy

   
       
   

V. JESUS AND THE MOSAIC LAW

V. 예수와 모세의 율법

Everything confirmed the fact that the meaning of Christ's teaching that had disclosed itself to me was true. But it was long before I could accustom my­self to the strange idea that after Christ's law had been professed by millions of people for 1800 years, and after thousands of men had devoted their lives to the study of that law, it had now been my fate to rediscover it as a novelty. But, strange as it might be, such was the case; Christ's teaching of non-resistance to evil arose before me as a total novelty of which I had not had the slightest conception. And I asked myself: How could this come about? I must have had some false conception of the mean­ing of the teaching to cause me so to misunderstand it. And such a false conception really existed.

나에게 드러난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의미가 진실이라는 사실을 모든 것이 확증해 주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율법을 1800년 동안 수백만의 사람들이 고백하였으며, 그리고 수천 명의 사람들이 그 율법의 연구에 그들의 삶을 헌신한 뒤에서야, 이제 그것을 마치 새로운 사상처럼 재발견하는 것이 나의 운명이 되었다는 이상한 생각에 익숙해지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렸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리 이상할지라도, 사실이 그러했다; 악에 대한 무저항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내가 전혀 짐작할 수 없는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서 나의 앞에 부상되었다. 그리고 나는 자신에게 물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나는 틀림없이 가르침에 대한 어떤 거짓된 인식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며 그리하여 그것을 오해하도록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잘못된 인식은 참으로 존재하였다.

When approaching the Gospel doctrine I was not in the position of one who never having heard anything of Christ's teaching suddenly hears it for the first time, but I already possessed a whole ready- made theory of how I ought to understand it. Christ did not appear to me as a prophet who was reveal­ing a divine law, but as one who completed and explained a divine law already known to me and indubitable. I already possessed a complete, defi­nite, and very complex teaching about God, the creation of the world and of man, and about His commandments given to man through Moses.

복음서의 교리에 접근할 때, 나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해서 결코 아무것도 들은 적이 없는 사람으로서 그것을 처음으로 듣는 위치에 있지 않았으며, 그러나 나는 이미 내가 그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관한 전반적인 기성 이론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리스도는 나에게 있어서 신성한 율법을 계시하여 주는 선지자가 아니라, 나에게 이미 알려져 있으며 의심할 여지가 없는 신성한 율법을 완전하게 해주고 설명해 주는 분처럼 보였다. 나는 이미 하나님, 세상과 사람의 창조, 그리고 모세를 통하여 사람에게 주어진 그의 계명들에 대한 완전하며, 정확한 그리고 매우 복잡한 가르침을 소유하고 있었다.

In the Gospels I encountered the words, 'Ye have heard that it was said, An eye for an eye, and a tooth for a tooth; but I say unto you, Resist not him that is evil'. The words, 'an eye for an eye and a tooth for a tooth', were the law of Moses. The words, 'Resist not evil, or him that is evil', were the new law which repealed the first.

복음서에서 나는 다음 말씀을 마주쳤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고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고하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의 말씀은 모세의 율법이었다. ‘악한 자에게 저항하지 말라’는 말씀은 처음의 말을 폐기하는 새로운 율법이었다.

Had I approached Christ's teaching without that theological theory imbibed with my mother's milk, I should have understood the simple meaning of his words. I should have understood that Christ denies the old law and gives a new law of his own. But it had been instilled into me that Christ did not deny the law of Moses, but on the contrary confirmed it all to the last jot and tittle and completed it. Verses 17 and 18 of Matt. v, in which this is affirmed, had always, when I read the Gospels, struck me as obscure and had evoked doubts. From what I then knew of the Old Testament, especially the last books of Moses in which such minute, meaningless, and often cruel, rules are laid down, each preceded by the words: 'And the Lord said unto Moses', it seemed to me strange that Christ could confirm the whole of that law, and incomprehensible why he did so. But I then left the question undecided: I accepted unverified the interpretation instilled into me from childhood that both these laws are productions of the Holy Ghost, that they agree, and that Christ confirms the law of Moses, supplements it, and completes it.

내가 만일 어머니의 젖을 빨 때부터 흡수하였던 신학적인 이론이 없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접근하였더라면, 나는 그의 말씀들의 단순한 의미를 깨달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모세의 율법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 모든 것의 한 점 한 획까지도 인정하였으며 율법을 완성하였다고 나에게 주입되어 왔었다. 마태복음 5장 17절 및 18절은, 그곳에서 이것이 주장되었는데, 내가 복음서를 읽을 때면 언제나, 나를 모호하게 하였고 의혹들을 불러 일으켰다. 그 당시 내가 알고 있던 구약성서, 특히 그토록 상세하고, 무의미하며, 가끔 잔인한 명령들로 차있는 모세 5경의 마지막 책들에서는, 매 장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일러 가로되…’ 라는 말들로 시작 되었는데, 내게는 그리스도가 그 율법 전체를 승인할 수 있다는 것이 이상하였으며, 왜 그가 그렇게 하였는지 이해할 수 없게 느껴졌었다. 그러나 그때 나는 그 문제를 미루어 두었다: 나는 이들 율법들이 성령이 만드신 것들이며, 그것들은 일치되며, 그리스도가 모세의 율법을 승인하고, 그것을 보완하며, 그것을 완성한다고 하는, 어릴 적부터 나에게 주입된 해석을 검증 받지 않은 채로 받아들인 것이다.

How that completion was effected, how the con­tradictions are solved which strike one's eye in the Gospels themselves, both in these verses and in the words, 'But I say unto you', I never clearly ex­plained to myself. But now, having recognized the simple and direct meaning of Christ's teaching, I understood that these two laws are contradictory and that there can be no talk of their agreement or of completing the one by the other, but that we must accept one or the other, and that the common explanation of verses 17 and 18 in Matt. v. (which had formerly struck me by their obscurity) must be incorrect. .

어떻게 그런 완성이 이루어졌으며, 복음서 자체에서, 즉, 이런 절들(마태복음5장 17, 18절)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하는 말씀들에서 우리의 시선을 끄는 모순들을 어떻게 해결하였는지, 나는 결코 나 자신에게 명료하게 설명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단순하고 직접적인 의미를 인식한 결과, 이들 두 율법이 서로 모순되며 그것들이 일치한다거나 하나를 다른 하나로서 완성한다느니 하는 말은 있을 수가 없으며, 그리고 마태복음 5장 17절과 18절(이것은 과거에 그 애매함으로 인해서 나의 시선을 끌었었다)의 일반적 해석이 틀림없이 부정확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And on re-reading those verses (the ones which had always seemed to me so obscure) I was amazed by the simple and clear meaning in them which suddenly revealed itself to me.

그리고 그 절들(언제나 나에게 그토록 애매하여 보이던 구절들)을 읽음에 있어서, 나는 나에게 갑자기 밝혀진 그것들의 단순하고 명료한 의미에 의해서 놀라고 말았다.

That meaning revealed itself to me not because I devised or transposed anything, but simply because I rejected the artificial interpretation which has been attached to that passage.

그 의미는 내가 어떤 것을 고안하였거나 바꾸어 말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내가 그 구절들에 부가된 인위적인 해석을 던져버렸기 때문이었다.

Christ says (Matt. v. 17-19): 'Think not that I came to destroy the law or the teaching of the pro­phets; I came not to destroy, but to fulfill. For verily I say unto you, Till heaven and earth pass away, one jot or one tittle shall in no wise pass away from the law till all things be accomplished.'

그리스도는 말한다 (마태복음 5장 17-19절):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 점 일 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And verse 20 adds: 'Except your righteousness shall exceed the righteousness of the scribes and Pharisees, ye shall in no wise enter into the kingdom of heaven.'

그리고 20절에서 덧붙인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Christ says: I have not come to destroy the eternal law, for the fulfillment of which your Scriptures and prophecies were written, but I have come to teach you to fulfill the eternal law; and I speak not of that law of yours which your scribes and Pharisees call the Law of God, but of that eternal law which is less changeable than the heavens and the earth.

그리스도는 말한다: 나는 너희의 거룩한 책과 예언서 들에 기록된 것을 성취하기 위하여 영생의 율법을 파괴하러 온 것이 아니라, 나는 너희가 영생의 율법을 성취할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왔다; 그리고 나는 너희의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율법이라고 부르는 그 율법이 아니라, 하늘과 땅보다도 변함이 적은 그런 영원한 율법에 대하여 말한다.

I express the thought in fresh words merely to tear the meaning away from the customary false interpretation. Were it not for that false interpreta­tion it would be impossible to express this thought better or more exactly than it is expressed in those verses. The interpretation that Christ does not deny the law is based on the fact that to the word 'law' in this passage- thanks to the comparison made with the iota (jot) of the written law- is attributed the meaning of the 'written law' instead of the 'eternal law'- though this is quite gratuitous and in con­tradiction to the meaning of the words. But Christ is not speaking of the written law. If he had spoken of the written law he would have used the customary expression, the law and the prophets, as he always does when speaking of the written law. But he employs a different expression: the law or the prophets. If he were speaking of the written law he would also in the next verse, which supplies a continuation of the thought, have used the words 'the law and the prophets', and not the word 'the law' without addition, as actually stands in that verse. More than that however, Christ uses the same expression in the Gospel of Luke in a connexion which makes its meaning indubitable. In Luke xvi. 15, 16 Christ says to the Pharisees who assumed righteousness in the written law: 'Ye are they that justify yourselves in the sight of men; but God knoweth your hearts: for that which is exalted among men is an abomination in the sight of God. The law and the prophets were until John: from that time the Gospel of the Kingdom of God is preached, and everyone entereth into it [by his own efforts].'

나는 습관화된 거짓 해석에서 단순히 그 의미를 떼어 놓기 위해서 신선한 말로 생각을 표현한다. 만일 그런 거짓된 해석이 없었다면, 그 구절들에서 표현된 것보다 더 훌륭하게 또는 정확하게 이런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그리스도가 율법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해석은 이 구절 안에 있는 ‘율법’이라는 단어에- 성문 율법의 일 점과 비교한 때문에- ’영원한 율법’ 대신에 ‘성문 율법’의 의미가 부여되었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사실 이것은 너무나 근거가 없으며 말씀의 의미에 모순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성문 율법을 말하고 있지 않다. 만일 그가 성문 율법을 말하였다면, 그가 성문 율법을 말할 때 언제나 그러하듯이, 관습적인 표현인, ‘율법 선지자들’을 사용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다른 표현을 이용하고 있다: ‘율법이나 선지자.’ 만일 그가 성문 율법을 말하고 있었다면, 그는 또한 생각의 연속을 나타내고 있는 다음 구절에서, 사실상 이 구절에 놓여 있는 것처럼, 덧붙임이 없는 ‘율법’이라는 말이 아니라, ‘율법 선지자들’이란 말을 사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는 똑 같은 표현을 문맥상 그 의미가 분명해지도록 누가복음에서도 사용한다. 누가복음 16장 15절에서 그리스도는 성문 율법 안에서 의롭다고 주장하는 바리새인들에게 말한다: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And then in the following verse, 17, he says: 'But it is easier for heaven and earth to pass away, than for one tittle of the law to fail.' By the words, 'the law and the prophets were until John', Christ repeats the written law. By the words, 'It is easier for heaven and earth to pass away than for one tittle of the law to fail', he confirms the eternal law. In the first words he says, 'the law and the prophets'-  that is to say the written law; in the second he says simply 'the law', therefore the law eternal. Consequently it is clear that here the eternal law is con­trasted with the written law, and that just the same contrast is made in the context in Matthew, where the eternal law is defined by the words, the law or the prophets.

그리고 나서 다음 구절에서 17절에서, 그는 말한다: ‘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의 없어짐이 쉬우니라.’ 그리스도는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라는 말로서 성문 율법을 되풀이 한다. ‘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의 없어짐이 쉬우니라.’는 말로서 그는 영원한 율법을 확인한다. 첫번째 말에서 그리스도는 말한다, ‘율법과 선지자들’- 다시 말하면, 성문 율법을, 두 번째에서 그는 단순히 ‘율법’을, 즉 영원한 율법을 말한다. 결국 여기서 영원한 율법은 성문 율법과 대립되어 있음이 명백하다, 그리고 똑 같은 대립은 문맥상 마태복음에서도 나타나는데, 그곳에서 영원한 율법은 ‘율법 또는 선지자들’이라는 말에 의해서 정의된다.

The history of verses 17 and 18 in their variations is remarkable. In most of the texts there is only the word 'law' without the addition of 'prophets'. In these versions there can be no suggestion that it means the written law. In other copies, in Tischendorf's and in the canonical version, there is the addition of 'prophets', not with the conjunction 'and', but with the conjunction 'or'- the law or the prophets- which also excludes the meaning of the written law and gives the meaning of the eternal law.

17절과 18절의 다양한 변화들에 대한 역사는 주목할 만하다. 대부분의 사본(寫本)들에 ‘선지자들’을 첨가함이 없이 오직 ‘율법’이란 말만 들어있다. 이런 번역 본들에서는 그것이 성문 율법을 뜻한다는 암시는 있을 수 없다. 다른 사본들에서는, 티센도르프의 사본과 정경 사본에서는, 접속사 ‘그리고’를 사용하지 않고, ‘또는’과 함께 ‘선지자들’을 첨가하였다- 율법이나 선지자들- 이것은 또한 성문 율법의 의미를 배제하며 영원한 율법의 의미를 나타낸다.

In some of the texts not accepted by the Church the addition of 'prophets' with the conjunction 'and', and not 'or', finds place- and in these same versions when the word 'law' is repeated 'and the prophets' is also repeated. So that the meaning of the whole utterance in these versions is given as though Christ spoke only of the written law.

교회에서 받아들이지 않는 어떤 사본에서는 ‘선지자들’이라는 말의 첨가가 접속사 ‘또는’이 아니라 ‘그리고’가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이와 똑 같은 사본들에서 ‘율법’이 반복될 때, ‘그리고 선지자들’ 또한 반복된다. 그래서 이 사본들에서의 전반적인 말의 의미는 그리스도가 오직 성문 율법만을 말한 것으로 되어진다.

These variations supply the history of the inter­pretation of that passage. The only clear rendering of the passage is that Christ here, as in Luke, is speaking of the eternal law. But among the copyists of the Gospel manuscripts were some who wished to assert the obligatoriness of the written law of Moses, and these scribes added to the word, 'law' the ad­ditional words 'and the prophets' and changed the meaning.

이들 사본의 변화는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의 역사를 말해둔다. 이 구절의 단 하나의 명료한 해석은 이렇다: 그리스도는 여기서, 누가복음에서처럼, 영원한 율법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복음서 원고들의 사본가(寫本家)들 중에는 어떤 이들은 모세의 성문 율법의 의무성을 강조하기를 원하였으며, 이들 필경자들은 ‘율법’이라는 말에 ‘그리고 선지자들’이라는 첨가하여서 그 의미를 바꾸었다.

Other Christians, who did not acknowledge the books of Moses, either excluded the addition or changed the word 'and', , to the word 'or', . And with this word 'or' the passage entered into the canonical version. But despite the clearness and certainty of the meaning of the text in that form in which it had entered the canon, the canonical interpreters continued to interpret it in the spirit that had prompted the alternative which had not been accepted in the text. The passage was sub­mitted to innumerable explanations which were the further removed from its plain meaning in proportion as the interpreter agreed less with the real, direct, simple meaning of Christ's teaching; and most of the interpreters retain the apocryphal sense- the very one rejected by the text.

모세 오경을 인정하지 않는 다른 기독교인들은, ‘그리고’, 라는 말의 첨가를 배제 하였거나, ‘또는’, 라는 말로 바꾸었다. 그리고 ‘또는’이라는 이 말과 함께 그 구절은 정경 사본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정경에 포함된 형태로서의 사본의 의미의 명료함과 확실성에도 불구하고, 정경 해석가들은 계속해서 그것을 사본에서 인정되어 오지 않은 다른 의미를 불러일으키는 정신으로 해석하였다. 이 구절은 무수한 많은 해석들에 포함되었으며, 해석가들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참되고, 직접적이며, 단순한 의미를 외면하면 할수록 그 원래의 의미에서 더욱 멀어졌다; 그리고 대부분의 해석가들은 외경(外經)적인 의미- 사본들이 거부하는 것 자체)- 를 담고 있다.

Fully to convince oneself that in these verses Christ is speaking only of the eternal law, it is worth while to examine the meaning of the word which served the pseudo-interpreters as an excuse. In Russian the word zakon (law), in Greek , and in Hebrew torah, all have two main meanings: one is the law itself (that which is right) without reference to its expression; the other conception is that of the written expression of what certain people consider to be the law. These two different meanings exist in all languages.

그리스도가 이 구절들에서 오직 영원한 율법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확신하기 위해서, 위선적인 번역가들이 구실로 삼고 있는 말의 의미를 조사할 가치가 있다. 러시아어에서는 zakon (율법)이라는 단어, 그리스어는 , 그리고 히브리어로는 torah로서, 모두다 두 가지 중심이 되는 의미들을 가진다: 하나는 그 표현 방법에 관계없이 율법 그 자체 (옳은 것)이며; 다른 개념은 특정한 사람들이 율법이라고 여기는 것의 성문(成文)적인 표현이다. 이 두 가지 다른 의미들은 모든 언어에서 존재한다.

In Greek, in the Epistles of Paul, this distinction is sometimes marked by the use of the article. Without an article, Paul uses this word chiefly in the meaning of the 'written law', but with the article in the meaning of the 'eternal law of God'.

그리스어로 되어있는 바울의 서한들에서, 이 구별은 때때로 관사의 사용으로 규정된다. 관사가 없는 경우, 바울은 이 단어를 주로 ‘성문 율법’의 의미로 사용한다, 그러나 관사가 있는 경우에 ‘하나님의 영원한 율법’의 의미로 사용한다.

Among the ancient Hebrews, in the prophets, as Isaiah, the word 'law', torah, is always used in the meaning of the one eternal revelation and teaching of God independent of verbal expression. And this same word 'law', torah, in Ezra for the first time, and in the latest period in Talmudic times, began to be used to mean the five written books of Moses, over which the general title of Torah was inscribed as we use the word Bible, but with this difference, that we have a word to distinguish the conception of the Bible from that of the law of God, while in Hebrew one and the same word was used for both conceptions.

고대의 히브리인들 사이에서, 이사야 같은 선지자들에게는, ‘율법’, torah 라는 말은 언제나 입으로 표현함과 관계없이 하나님의 유일하며 영원한 계시와 가르침의 의미로 사용된다. 그리고 이 똑 같은 말 ‘율법’, torah 는, 처음에는 에즈라서에서, 그리고 탈무드 시대의 마지막 시기에서, 모세의 다섯 가지 성문 서적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이것들에 대해서, 우리가 바이블이라는 말을 사용하듯이, Torah라고 하는 일반적인 제목이 붙여졌으나, 이런 차이가 있었다, 즉,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과 바이블이라는 개념을 구별할 수 있는 말이 있지만, 히브리인들에게는 두 가지 개념에 하나이며 똑 같은 말이 사용되었다.

And therefore Christ using the word 'law', torah, employs it now to confirm it when he uses it in the meaning given it by Isaiah and the other prophets, of the law of God which is eternal, and now to reject it when he means by it the five books of the law. But for the sake of distinction when (rejecting it) he uses this word in the meaning of the written law he always adds the words 'and the prophets', or pre­fixes the word 'your' to the word 'law'. When he says, 'Whatsoever ye would that men should do unto you, even so do ye also unto them, for this is the law and the prophets', he is speaking of the written law. He says that the whole of the written law can be compressed into this one expression of the eternal law and by these words he annuls the written law.

그리고 그러므로 ‘율법’, torah 라는 말을 사용하는 그리스도는 지금, 이사야와 다른 선지자들에 의해서 주어지는 의미- 영원한 하나님의 율법- 로서 그것을 사용할 때는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그리고. 율법의 다섯 가지 책을 의미할 때는 그것을 부정하기 위해서 사용한다. 그러나 구별을 위해서, 그리스도는 이 말을 성문 율법의 의미로 사용할 때 (그것을 부정하기 위하여), 그는 언제나 ‘그리고 선지자들’이라는 말들을 첨가하거나 ‘너희들’이라는 말을 ‘율법’의 접두어로 사용했다. 그리스도가, ‘무릇 남에게 그런 일을 당하고 싶지 않은 것은 남에게도 그처럼 행하지 말라 이것이 율법과 선지자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할 때, 그는 성문 율법을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성문 율법 전체는 영원한 율법의 이런 한 가지 표현으로 압축될 수 있다고 말하고 이 말로서 그는 성문 율법을 폐지한다.

When he says (Luke xvL 16), 'The law and the prophets were until John', he is speaking of the, written law and by these words denies its authority.

그가, ‘율법과 선지자들은 요한의 때까지’ (누가복음 16장 16절)라고 말할 때, 그는 성문 율법을 말하고 있으며, 이 말로써 그 권위를 부정한다.

When he says (John vii. 19), 'Did not Moses give you the law, and yet none of you doeth the law?' or (John viii. 17), 'In your law it is written', or (John xv. 25), 'The word that is written in their law', he is speaking of the written law: the law he denied, the law which condemned him to death. (John xix. 7) 'The Jews answered Pilate, We have a law, and by that law he ought to die' Evidently that law of the Jews, on the basis of which they executed him, is not the law Christ taught. But when Christ says, 'I came not to destroy the law but to teach you to fulfill it, for nothing can change in the law, but all must be fulfilled', he is speaking not of the written law but of the divine eternal law and is confirming it.

그리스도가, (요한복음 l장 19절)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또는 (요한복음 8장 17절) ‘너희 율법에도 기록하였으니’ 또는 (요한 15장 25절) ‘이는 저희 율법에 기록된 바’라고 말할 때, 그는 성문 율법을 말하고 있다: 그가 부정한 율법, 자신을 사형에 처한 율법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 (요한복음 19장 7절) ‘유태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저가 당연히 죽어야 한다.’ 분명히 유태인들의 그러한 율법은, 그것을 근거로하여 글를 사형에 처하였으며, 그리스도가 가르쳤던 율법은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나는 율법을 파괴하러 온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너희들이 완성하도록 가르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온 것이다. 누구든지 그 율법을 변경시킬 수 없으며 모두 성취되어야 한다’라고 말할 때, 그는 성문 율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율법을 말하고 있으며 그것을 확인하고 있다.

But let us suppose that all these are merely formal proofs; let us suppose that I have carefully selected contexts and variations and have carefully hidden everything opposed to my interpretation; let us suppose that the Church's interpretation is very clear and convincing and that Christ really did not infringe the law of Moses but left it in full strength. Suppose that to be so. But then what did Christ teach?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단순히 형식적인 증명들이라고 가정해 보자; 내가 원문과 다양한 해석들을 조심스럽게 골라서 나의 해석에 대치되는 모든 것을 교묘히 숨겼다고 가정해 보자; 교회의 해석이 지극히 명료하고 신빙성이 있으며, 그리스도가 모세의 율법을 침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완전한 힘을 갖추도록 하였다고 가정해 보자. 이 모든 것이 그렇다고 가정하여 보라.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무엇을 가르쳤는가?

According to the Church's explanations he taught that he, the Second Person of the Trinity, the Son of God the Father, came to the earth and by his death redeemed Adam's sin. But everyone who has read the Gospels knows that in them Christ says nothing, or speaks very vaguely, about that. And even assuming that we do not know how to read and that the above assertions really are made there, at any rate Christ's indication that he is the Second Person of the Trinity and redeems the sins of humanity occupies the smallest and most obscure portion of the Gospels. What then does all the rest of Christ's teaching consist of? It is impossible to deny, and Christians have always acknowledged, that the chief content of Christ's message is the teaching of life: how men should live with one another.

교회의 해석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삼위일체의 제2위이며,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로서, 이 세상에 오셔서 죽음으로써 아담의 죄를 대속하였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복음서를 읽은 사람은 누구나,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 그리스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거나 그것에 대해 너무나 모호하게 말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심지어 우리가 책을 읽는 법을 모르며 위의 주장들이 정말로 거기에 나와 있다고 가정하더라고, 어쨌든 그리스도가 삼위일체의 제2위이며 인류의 죄를 대속한다는 그의 암시는 복음서에서 가장 경미하고 가장 희미한 분량을 차지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나머지 부분 모두는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그것은 부정할 수도 없으며, 기독교인들이 언제나 인정해오고 있었던 것으로, 그리스도의 메시지의 주된 내용은 삶에 대한 가르침이다: 사람들이 이웃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인 것이다.

Having admitted that Christ taught a new way of life, one has to picture to oneself some definite kind of people among whom he taught.

만일 그리스도가 삶의 새로운 방법을 가르쳤다는 것을 인정하려면, 우리는 그가 가르친 사람을 가운데 어떤 특별한 종류의 사람을 그려 보아야만 한다.

Let us imagine to ourselves Russians, or English­men, or Chinese, or Indians, or even savages on an island, and we shall see that every nation always has its rules of life, its law of life, and that therefore if a teacher teaches a new law of life he thereby destroys the former law: without destroying it he cannot teach. So it would be in England, in China, and among ourselves. The teacher will inevitably destroy our laws, which we consider precious and almost holy; but among us it might occur that the preacher teaching us a new way of life will only destroy our civil law, our State law, or our customs, but will not touch the laws we consider divine- though it is hard to imagine this. But among the Jewish people who then had only one code of law - entirely divine and embracing the whole of life to its minutest details- among such a people what could a preacher teach who declared in advance that the whole law of the people among whom he was preaching was valid? But let us say that this, too, is not a proof. Let those who interpret the words of Christ to mean that he confirmed the whole law of Moses explain this to themselves: Who was it that, throughout his active career, Christ exposed? Against whom did he revolt, call­ing them Pharisees, lawyers, and scribes? Who was it that rejected Christ's teaching? Whose High Priest had him crucified? If Christ acknowledged the law of Moses, where were those true adherents of that law who approved of him for doing so? Can it be that there was not one such?

우리 자신이 러시아인, 영국인, 중국인, 인도인, 또는 어떤 섬의 야만인이라고 상상해보자, 그러면 우리는 모든 민족은 언제나 나름대로의 삶의 규칙들이, 삶의 율법들을 가지고 있으며, 그러므로 만일 어떤 교사가 삶의 새로운 율법을 가르치려면 그로 인해서 옛날의 율법을 폐지하여야 한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것을 폐지하지 않고서는 그는 가르칠 수 없다. 그것은 영국, 중국, 그리고 우리 자신들 안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교사는 필히 우리의 율법들을 파괴할 것이며, 그것들은 우리가 소중하며 거의 신성하게 여기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삶의 새로운 방법을 가르치는 설교자가 오직 우리의 시민법, 우리의 국가법, 또는 우리의 관습법을 파괴할 뿐이며, 우리가 신성하다고 여기는 법들을 건드리지 않는 일이 우리에게 일어날지도 모른다- 비록 이러한 일을 상상하기 힘들지라도. 그러나 그 당시 오직 한 가지의 율법- 전적으로 신성하며 삶의 전체를 지극히 사소한 부분까지 포함하는- 만을 가지고 있던 유태인들 사이에서, 그러한 사람들 사이에서 만일 사전에 그 설교자가 설교하는 사람들에 속한 전체 율법이 정당하다고 선언하였다면, 그 설교자는 무엇을 가르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이것 역시 증명할 수 없다고 가정하자. 그리스도가 모세 율법 전체를 승인하였음을 의미한다고 그리스도의 말씀들을 해석하는 사람들이 이것을 자신들에게 설명해보라고 해보자: 그리스도가, 그의 왕성한 생애를 통해서, 폭로한 사람들은 누구였는가? 그들을 바리새인들, 율법학자들, 그리고 서기관들이라고 부르면서, 그는 누구를 향해 반대하였는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거부한 사람들은 누구였는가? 어떤 사람들의 대제사장이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았는가? 만일 그리스도가 모세의 율법을 받아들였다면, 그가 그렇게 행함을 용인하던 율법의 진정한 추종자들은 어디에 있는가? 그런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 가능할까?

The Pharisees, we are told, were a sect. The Jews do not say so! They say; The Pharisees were the faithful adherents of the law. But let us grant that they were a sect. The Sadducees were also a sect. Where, then, were the people, who were not a sect but true believers?

우리가 듣기로 바리새인들은 한 분파였다고 한다. 유태인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말한다: 바리새인들은 성실한 율법의 추종자였다. 그러나 그들도 한 분파였다고 인정하자. 사두개파들도 한 분파였다. 그렇다면 분파가 아니라 참된 신자들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In the Gospel of John they all- Christ's enemies- are called simply the Jews. And they did not agree with Christ's teaching and were opposed to him simply because they were Jews. But in the Gospels not only the Pharisees and Sadducees are represented as Christ's enemies: among his enemies the lawyers are also mentioned, the very men who conserved the law of Moses; the Scribes, the very men who read the law; the Elders, the very ones who were always considered the representatives of national wisdom.

요한 복음에 의하면 그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적들- 단순히 유태인이라고 불렸다. 그리고 그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동의하지 않았으며 자신들이 유태인이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그를 반대하였다. 그러나 복음서에서는 바리새인들 뿐만 아니라 사두개인 들도 그리스도의 적들로 묘사되었다: 그의 적들 중에는 율법사들이 또한 언급되었는데, 그들은 바로 모세의 율법을 보존하려는 사람들이었으며; 서기관들, 그들은 바로 율법을 읽어주는 사람들이었으며; 장로들, 그들은 바로 언제나 민족의 지혜의 대변자들로 여겨지는 사람들이었다.

Christ said: 'I came not to call the righteous, but sinners to repentance'- to a change of life, . Where and who, then, were these righteous? Was Nicodemus the only one? But even Nicodemus is represented to us as a kindly but erring man. We are so accustomed to the very strange explanation that the Pharisees and some wicked Jews crucified Christ, that the simple question never enters our heads: Where were those who were not Pharisees and not wicked, but real Jews who kept the law? One has only to put that question and it all be­comes plain. Christ- whether he was God or man- brought his teaching into the world among a people who kept a law which regulated the whole of their lives and was called the law of God. What relation could Christ have to that law?

그리스도가 말했다: ‘나는 의로운 자들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회개하도록’- 삶의 변화, - 하기 위해서 왔다. 그렇다면 이들 의로운 사람들은 어디에 있으며 누구였을까? 유일하게 니고데모 한 사람이었을까? 그러나 심지어 니고데모도 선량하였지만 과오를 저지르는 사람으로 제시되었다. 우리는 바리새인들과 어떤 사악한 유태인들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매우 이상한 설명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어서, 그런 단순한 의문이 결코 우리의 머리에 떠오르지 않는다: 바리새인들도 아니며 사악하지도 않으면서 율법을 준수하는 참된 유태인들은 어디에 있었을까? 우리는 오직 그 의문을 제기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모든 것은 명백해진다. 그리스도는- 자신이 하나님이건 사람이건- 자신의 가르침을 사람들의 삶의 전체를 규정하며 하나님의 율법이라고 불리는 율법을 지닌 세상 사람들에게 가져왔다. 그리스도는 이 율법에 대해 어떤 관계를 가질 수 있어야만 하는가?

Every prophet- every teacher of a faith revealing the law of God to men- inevitably encounters among men something people believe to be the law of God, and so he cannot avoid making use of the word law in a double sense; for it means what people falsely consider to be the law of God, 'your law', and it also means the true, eternal law of God. But besides being unable to avoid a double use of that word, the preacher usually does not wish to avoid it, but intentionally unites the two meanings: indicating that the law, which taken in its entirety is false and which is professed by those whom he is addressing, does contain certain eternal truths. And every preacher will take those laws which are fundamentally true as the basis of his sermon. That is what Christ did among the Jews, among whom both laws were called by the one word torah. Christ, in reference to the law of Moses- and to a yet greater extent in reference to the prophets, especi­ally Isaiah whose words he constantly quoted-  acknowledged that in the Hebrew law and prophets there are eternal and divine truths coincident with the eternal law, and these-  such as the saying, 'Love God and thy neighbor'- he takes as the basis of his teaching. Christ often expresses this thought. (Luke x. 26) He says, 'What is written in the law? how readest thou?' In the law also there are eternal truths to be found, if you only know how to read it. And he points out more than once that the commandment in their law relating to the love of God and of one's neighbor is a command­ment of the eternal law. In Matt. xiii. 52, Christ, after all the parables by which he explained to his Apostles the meaning of his teaching, finally, as re­ferring to all that had preceded, said: 'Therefore every scribe [that is every literate person who has learned the truth] is like unto a householder, which, bringeth forth out of his treasure [indiscriminately, both together] things new and old.'

모든 선지자- 하나님의 율법을 알리는 신앙을 가르치는 모든 교사들- 는 필연적으로 사람들 사이에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율법이라고 믿는 어떤 것을 조우하게 된다, 그리고 그래서 그는 율법이라는 말을 이중적인 의미에서 사용함을 피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들이 거짓되이 하나님의 율법, 즉 ‘너희들의 율법’이라고 여기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고,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참되며 영원한 율법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의 이중적인 사용을 피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설교자는 흔히 그것을 피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고의로 두 가지 의미들을 결합하려고 한다: 한 편으로는 그 전체가 거짓이며, 다른 한 편으로는 자신이 설교하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고백되는, 그 율법이 어떤 영원한 진리들을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각각의 설교자는 근본적으로 진리인 율법들을 그들의 설교의 토대로 삼는다. 이것이 그리스도가 유태인들 사이에서 행한 일이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는 두 가지 율법이 함께 torah라는 말로 불렸다. 그리스도는, 모세의 율법을 참조함에 있어서- 그리고 더 큰 비중으로 선지자들을, 특히 부단히 인용되는 이사야를, 참조함에 있어서- 히브리 율법과 선지자들에게도 영원한 율법과 일치하는 영원하며 신성한 진리들이 있다고 인정하였으며, 그리고 이러한 말을- ’하나님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그의 가르침의 밑바탕으로 삼고 있다. 그리스도는 가끔 이러한 나타낸다. 그는 (누가복음 10장 26절)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었느냐?’라고 말한다. 율법에도 또한 만일 우리가 오직 바로 읽을 줄만 안다면 영원한 진리들이 발견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그들의 율법 안에서 하나님과 이웃들에 대한 사랑과 관련있는 계명이 영원한 율법의 계명이라는 것을 여러 번 강조하였다. 마태복음 13장 52절에서 그리스도는, 그의 제자들에게 많은 비유들로서 그의 가르침의 의미를 설명한 뒤에, 앞에 일어난 모든 것을 언급하면서, 결론으로서 말했다: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마다[즉 진리를 배운 모든 읽고 쓸 줄 아는 사람] 마치 새것과 옛 것을 그 곳간에서 내려 오는[구별하지 않고, 함께] 집 주인과 같으니라.’

St. Irenaeus, and following him the whole Church, understood these words in that way; but quite arbitrarily, and to the infringement of the meaning of the whole speech, attached to them also the implication that all that was old was sacred. The plain meaning is that he who seeks what is good takes not only what is new but what is old, and that it must not be rejected simply because it is old. By these words Christ says that he does not deny those things in the old law which are eternal. But when he is spoken to of the whole law or its forms, he says that one must not pour new wine into old bottles. Christ could not confirm the whole law, but neither could he reject the whole law and the prophets- that law in which is said, ‘Love thy neighbor as thyself', and those prophets whose words he often used to express his own thoughts. And lo and behold, instead of this simple, clear understanding of these words, which as they were spoken and in the way they confirm the whole of Christ's teaching are very simple, a misty explana­tion is substituted introducing a contradiction where none existed and thereby destroying the meaning of the teaching and reducing it to verbiage, and practically re-establishing the teaching of Moses in all its savage cruelty.

성 이레네우스와 그를 따르는 모든 교회도 이 말들을 그런 식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매우 임의적으로, 그리고 전체 말씀의 의미를 손상시키면서, 또한 그것들에다가 오래된 모든 것들이 신성하다는 암시를 부가하였다. 단순한 의미인즉, 선을 구하는 사람은 새로운 것 뿐만 아니라 묵은 것도 취하며, 그것이 묵은 것이기 때문에 단순히 거부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말씀들에 대해서 그리스도는 옛날 율법에 담기어 있어도 영원한 것들은 거부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전체 율법이나 그 형식에 대하여 말할 때, 우리가 새 술을 묵은 병들에 부어서는 안 된다고 그는 말한다. 그리스도는 전체 율법을 승인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전체 율법과 선지자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율법과, 그가 종종 자신의 사상들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말들을 인용하는 선지자들- 을 거부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보라, 그리스도가 말씀하신 그대로, 그리스도의 가르침 전체가 매우 단순하다고 그것들이 확인하여 주는 방법 안에서, 이런 말씀들에 대한 이토록 단순하며 명료한 이해 대신에, 애매한 해석으로 대체하여 모순이 없는 곳에 모순을 소개하고, 그래서, 가르침의 의미를 파괴하고 장황한 말로 전락시키며, 사실상, 그 모든 야만적인 잔혹함으로 모세의 가르침을 복원하고야 마는 것이다.

According to all the Church's interpretations, especially since the fifth century, Christ did not infringe the written law but confirmed it. But how did he confirm it? How can the law of Christ be united with the law of Moses? To that no reply is given. In the interpretations a play of words is made use of, and it is said that Christ fulfilled the law of Moses in that in him the prophecies were ful­filled, and that Christ through us, by man's faith in him, fulfills the law. The only question essential to every believer (as to how to unite two contradictory laws governing human life) is left without even an attempt to meet it. And the contradiction between the verse in which it is said that Christ does not destroy the law and the verses which say, 'Ye have heard that it was said . . . but I say unto you . . .', and again between the whole spirit of the teaching of Moses and that of Christ, remains in full force.

교회의 모든 해석에 따르면, 특히 15세기 이후에, 그리스도는 성문 율법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확인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는 성문 율법을 어떻게 확인했을까? 그리스도의 율법이 모세의 율법과 어떻게 결합될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은 한 마디도 없다. 해석들에는 말 장난이 이용되고 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예언들이 성취되었다고 하면서 그리스도가 모세의 율법을 완성했으며, 그에 대한 사람들의 신앙에 의해서, 그리스도가 우리를 통하여 율법을 완성한다고 말한다.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본질적인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두 가지 모순된 율법을 하나로 묶는 방법에 대한) 한가지 의문은 심지어 그것을 타개하려는 시도도 없이 남겨진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율법을 파괴하지 않는다고 말한 구절과 ‘너희는 …라는 것을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고하니…’를 말하는 구절들 사이의 모순, 그리고 모세의 가르침의 전체 사상과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사상 사이의 모순은, 완전한 힘을 지닌 채 남아있다.

Anyone interested in this question should look at the Church's interpretations of this passage, from St. John Chrysostom to our times. Only by reading these long dissertations will he be clearly convinced that here no solution of the contradiction is offered, but that a contradiction is artificially introduced where none existed.

이런 의문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누구라도, 성 크리서스톰에서부터 우리 시대에 이르기까지, 이 구절에 대한 교회의 주석들을 조사해 보아야 한다. 오직 이런 긴 논문들을 읽음으로써, 이들의 주석들은 모순에 대한 아무런 해답을 주지 않을 뿐더러, 그 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모순을 인위적으로 소개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확인하게 될 것이다.

The impossible attempts to unite the unsuitable clearly indicated that this union is not the result of a mistake but has a clear and definite aim - it was needed. And it is even obvious why it was needed.

어울리지 않는 것들을 결합하려는 불가능한 시도는 이런 결합이 실수로서 나온 것이 아니라 명백하고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있음을 명백하게 가리킨다- 그것은 필요했다. 그리고 왜 그것이 필요하였는지는 너무나 분명하다.

This is what St. John Chrysostom says, replying to those who rejected the Mosaic law (Homilies on the Gospel of Matthew. Part I. Homily xvi. Pusey's Library of the Fathers, pp. 236-7):

이것은 성 존 크리서스톰이 모세의 율법을 거부한 사람들에게 대답하면서 말한 것이다(마태복음에 관한 설교. 제 1부, 설교 14. 푸세이의 교부들에 관한 문고, 236-7페이지):

'In the next place, they criticize the Law in the Old Covenant, which bids us put out an eye for an eye, and a tooth for a tooth, and straightway they insult and say: "Why, how can he be good who speaks so?" What then do we say in answer to this? That it is the highest kind of philanthropy. For He made this law, not that we might strike out one another's eyes, but that fear of suffering by others might restrain us from doing any such thing to them. As therefore He threatened the Ninevites with over­throw, not that He might destroy them (for had that been His will He ought to have been silent), but that He might by fear make them better and so quiet His wrath: so also hath He appointed a punishment for those who wantonly assail the eyes of others, that if good principles dispose them not to refrain from such cruelty, fear may restrain them from injuring their neighbor's sight.

‘다음으로, 그들은 구약의 율법을 비난한다. 구약은 우리에게 눈에는 눈을, 그리고 이에는 이를 뽑으라고 명령한다, 그러면 그들은 즉각 모욕을 하면서 말한다: “아니, 이처럼 말하는 자가 어떻게 선한 사람일 수 있는가?” 그러면 우리는 이것에 대한 대답으로 무엇이라고 말해야 하는가? 그것은 가장 숭고한 인류애이다라고.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 율법을 만드신 것은, 우리가 서로의 눈을 때려서 뽑으라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 의한 고통의 두려움이 우리들로 하여금 그들에게 그러한 행위를 가하는 것을 억제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니느웨성의 주민들에게도 멸망의 위협을 주었지만 그들을 멸망시키려 함이 아니라(왜냐하면 하나님이 실제 멸망하기를 원했다면 그는 다만 침묵하였을 것이다), 그들에게 공포를 주어서 회개하게 만들고 그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함이었던 것처럼; 하나님은 악의로 다른 사람의 눈을 공격하는 사람들에 대한 형벌을 만들었으며, 만일 훌륭한 신념들이 그들로 하여금 그토록 잔인함을 금하도록 만들지 못한다 하더라도, 공포로 인해서 그들이 이웃의 시력에 손상을 가하는 것을 막도록 하기 위함이다.

'And if this be cruelty, it is cruelty also for the murderer to be restrained, and the adulterer checked. But these are the sayings of senseless men and of those that are mad to the extreme of mad­ness. For I, so far from saying that this comes of cruelty, should say that the contrary to this would be unlawful, according to men's reckoning. And whereas thou sayest, "Because He commanded to pluck out an eye for an eye, therefore He is cruel"; I say that if He had not given this commandment then He would have seemed, in the judgment of most men, to be that which thou sayest He is.'

‘만일 이 율법이 정말 잔인하다면, 살인자를 제지하고, 간음한 자를 저지함도 역시 잔인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제정신이 아닌 사람들의 그리고 광기가 극에 달한 사람들의 말이다. 왜냐하면 나는, 이것이 잔인함의 결과라고 말하기는커녕, 인간의 상식에 따른다면, 이것에 반대되는 것들이 비합법적이라고 말하고자 한다. 그리고 당신이 “하나님이 눈에는 눈으로 뽑아야 한다고 명령했기 때문에, 그가 잔인하다”고 말하는 한; 만일 하나님이 이런 계명을 주지 않았다면, 대부분 사람들의 판단에는, 당신이 하나님은 그렇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라고 말한다.’

St. John Chrysostom definitely accepts the law of a tooth for a tooth as divine, and what opposes the taking of a tooth for a tooth (that is to say, Christ's teaching of non-resistance) as unlawful (pp. 237-8). 'For let us suppose that this law has been done away', says St. John Chrysostom, 'and that no one feared the punishment ensuing thereupon, but that license had been given to all the wicked to follow their own dispositions in all security, to adulterers, and to murderers, to perjured persons and to parricides; would not all things have been turned upside down ? Would not cities, market- places and houses, sea and land, and the whole world, have been filled with unnumbered pollutions and murders? Every­one sees it. For when there are laws, and fear, and threats, our evil dispositions are hardly checked; were even this security taken away, what is there to prevent men's choosing vice? and what degree of mischief would not then come revelling upon the whole of human life? The rather, since cruelty lies not only in allowing the bad to do what they will, but in another thing too quite as much; to overlook, and leave uncared for, him who hath done no wrong, but who is without cause or reason suffering ill. For tell me: were anyone to gather together wicked men from all quarters, and arm them with swords, and bid them go about the whole city and massacre all that came in their way, could there be anything more like a wild beast than he? And what if some other should bind, and confine with the utmost strictness, those whom that man had armed, and should snatch from out those lawless hands them who were on the point of being butchered, could anything be greater humanity than this?'

성 크리서스톰은 이에는 이를 명확하게 하나님의 율법으로 받아들이고, 이에는 이를 받아들임에 반대하는 것(즉, 무저항에 관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합법적이 아니라고 한다 (237-8페이지). 성 크리서스톰은 말한다: ‘이유인즉, 이 율법이 폐지되었으며, 그것이 규정하던 처벌을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모든 사악한 사람들에게 그들의 자신의 성벽에 따라서 마음대로 행동하게 하고, 간음자들에게, 살인자들에게, 위증자들에게 그리고 근친 살해자들에게 제멋대로 할 자유가 주어졌다고 가정해 보자; 모든 것들이 뒤집히지 않겠는가? 도시들, 시장들 그리고 집들, 바다와 육지가, 그리고 전 세상이 수를 셀 수 없는 오염들과 살인들로 가득차지 않겠는가? 누구나 그리 될 것임을 안다. 율법들, 공포 그리고 위협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악한 성향들은 거의 제지되지 않는다; 만일 심지어 이런 방어들이 제거된다면, 사람들의 악한 결정을 무엇으로 막을 것인가? 그리고 인간의 삶 전체에 어느 정도의 불행이 덮쳐 오지 않겠는가? 오히려 더할 것이다, 왜냐하면 잔인함은 악인들이 그들 마음대로 할 수 있도록 방치함에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것에서도 그와 똑같이 존재한다: 아무 잘 못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아무런 원인이나 이유 없이 고통을 당하는 사람을 간과하고 보호받지 않은 채 버려 두는 것이다. 이유인즉, 내게 말해보라: 만일 어느 누가 온 천지에서 사악한 사람들을 불러 모아서, 그들을 칼로 무장시키고, 그들에게 전 도시를 돌아다니며, 그들에게 걸리는 모든 사람들을 학살하라고 명령한다면, 그 보다 더 난폭한 짐승 같은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그리고 다른 어떤 사람들이 무장한 사람을 묶어서 최상의 엄중함으로 가두어 두고, 도살되기 직전에 있는 사람들을 무법자의 손에서 가까스로 구해준다면, 이보다 더 위대한 인류애가 있을 수 있을까?

St. John Chrysostom does not say by what stan­dard one would be guided in determining who are evil. What if he were himself evil and imprisoned the good?

성 크리서스톰은 누가 악인인지 결정함에 있어서 우리가 어떤 기준으로 처리해야 될 지를 말하지 않는다. 만일 그 자신이 악인이라서 선한 사람을 감옥에 가두었다면 무엇이라고 말을 할 수 있겠는가?

'Now then, I bid thee transfer these examples to the Law likewise, for He that commands to pluck out an eye for an eye, hath laid the fear as a kind of strong chain upon the souls of the bad, and so resembles him who detains those assassins in prison; whereas he who appoints no punishment for them, doth all but arm them by such security, and acts the part of that other who was putting the swords in their hands and letting them loose over the whole city.'

‘이제 그렇다면, 나는 이런 예들을 같은 방법으로 율법에 적용해볼 것을 당신들에게 명한다, 왜냐하면 눈에는 눈을 뽑을 것을 명령하는 분은 악한 사람들의 영혼에 일종의 강한 쇠사슬로서 공포를 심어 놓는다, 그리고 이는 그들 살인자들을 감옥에 쳐넣는 사람과 유사하다; 이에 반하여 그들에게 아무런 처벌을 가하지 않는 사람은 오로지 그들을 안심으로 무장시키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서 시가지에 풀어 놓는 사람의 역할을 행하는 사람과 같다.’

If St. John Chrysostom acknowledged the law of Christ, he should explain who will pluck out the eyes and the teeth and cast others into prison. If he who forbids us to do so, that is to say if God Himself, plucked them out, there would be no con­tradiction, but it is men who have to do it; and these men the Son of God has commanded that it should not be done. God said, pluck out teeth, and His Son said, do not pluck them out. One or the other has to be acknowledged; and St, John Chrysostom, and following him the Church in general, acknowledges the command of God the Father, that is to say of Moses, and rejects the command of the Son, that is of Christ, whose teach­ing he is supposed to profess. Christ rejects the law of Moses and gives his own. For a man believing in Christ there is no contradiction. Disregarding the law of Moses he believes in the law of Christ and fulfils it. For one believing in the law of Moses there is also no contradiction. The Jews consider the words of Christ vain, and believe in the law of Moses. There is a contradiction only for those who wish to live by the law of Moses but assure themselves and others that they believe the law of Christ - for those whom Christ calls hypocrites, the off­spring of vipers.

만일 성 크리서스톰이 그리스도의 율법을 고백하였더라면, 누가 다른 사람들의 눈과 이를 뽑고 감옥에 처넣을 것인가를 설명해야 할 것이다. 만일 그렇게 하도록 금지하는 사람, 다시 말하면 만일 하나님 자신이 그것들을 뽑는다면, 아무런 모순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일을 행해야 하는 것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 명령하시기를 그렇게 행해져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이빨을 뽑으라고 말씀하셨으며, 그의 아들은 이빨을 뽑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이나 저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성 크리서스톰과 그를 따르는 전체 교회는, 하나님 아버지의, 다시 말하면, 모세의 명령을 받아 들이고, 아들의, 즉, 그리스도의 명령을 거부하며, 그러면서 그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고백한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모순이 없다. 그는 모세의 율법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율법을 믿으며 그것을 행한다. 모세의 율법을 믿는 사람도 아무런 모순이 없다. 유태인들은 그리스도의 말씀들을 빈 말로 여기고 모세의 율법을 믿는다. 모세의 율법에 따라서 살기를 바라면서 자신들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이 그리스도의 율법을 믿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만 오직 모순이 존재한다- 그리스도는 그들을 위선자라고 부르며, 뱀의 자식들이라고 부른다.

Instead of acknowledging one of the two, the law of Moses or of Christ, they acknowledge both to be divinely true.

둘 중의 하나, 즉, 모세의 율법 또는 그리스도의 율법중의 하나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양자가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

But when the question touches life itself, the law of Christ is simply denied and the law of Moses acknowledged.

그러나 삶 자체에 문제가 일어나면, 그리스도의 율법은 무조건 팽개쳐지고, 모세의 율법이 받아 들여진다.

In this false interpretation, if one examines its meaning, lies a terrible drama of the struggle of evil and darkness with goodness and light.

이런 거짓된 해석 안에, 만일 우리가 그 의미를 조사해 보면, 악 과 어둠이, 선 과 빛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무서운 드라마가 놓여 있다.

Among the Jewish people, confused by in­numerable external rules laid on them by the Levites as divine laws and each stamped with the words 'The Lord said unto Moses', Christ appeared. He found not only the relations of man to God, his sacrifices, holidays, and fasts, but all the relations of man to man- the national, civil, and family relations- and all the details of private life- circumcisions, the washings of man's person, and of his cups and his dress- all defined to the last detail and all acknowledged as the command of God, law of God. What can, I will not say Christ- God- but a prophet or an ordinary teacher, teach to such a people without infringing this law, which defines everything down to the smallest details? Christ, like all the prophets, selects from among the things the people considered to be the law of God that which was really the law of God. He takes the foundations and rejects all the rest, and unites his own revelation of the eternal law with these foundations. There is no need to destroy everything, but inevitably the law, which was considered equally obligatory in all its parts, is broken. Christ does this; and he is accused of breaking what was con­sidered to be the law of God, and for this he is executed. But his teaching remains among his disciples and passes into another circle and into other centuries. But in this other circle and these other centuries the new teaching is again over­grown by similar accretions, interpretations, and, explanations- again mean human inventions re­place the divine revelation. Instead of 'And the Lord said unto Moses', we are told: 'It seemed good to the Holy Ghost and to us', and again the letter hides the spirit. And the most surprising of all, the teaching of Christ becomes involved with all that torah(in the meaning of the written law) which he could not but reject. That torah is acknowledged to be the production of the revelation of his Spirit of truth, of the Holy Ghost, and he is himself caught in the meshes of his own revelation and his whole Teaching is reduced to nothing.

유태 민족들 사이에, 그들이 레위족들에 의해서 신성한 율법들로 부과되는 수없이 많은 형식적인 규칙들- 각기 규칙들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와 같은 상투적인 문구로 시작되었다- 에 의해서 혼란에 빠진 상태에서, 그리스도가 나타났다. 그는 사람의 하나님에 대한 관계들- 그의 제물들, 축일들, 단식일들- 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민족적, 시민적, 가족적인 관계들- 그리고 개인적인 삶의 상세한 모든 부분들- 할례, 자신의 육체, 자신의 식기와 자신의 의복의 정결- 까지, 모든 것들이 마지막 하나에 이르기까지 정의되어서 하나님의 명령, 하나님의 율법으로 받아들여 졌다. 내가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를 말하지 않더라도, 단지 선지자 또는 평범한 교사가, 그러한 사람들에게 저 아래의 가장 세세한 부분까지도 모든 것을 정의하고 있는 이런 율법을 침해하지 않고서, 무엇을 가르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는, 모든 선지자들처럼, 사람들이 하나님의 율법이라고 믿고 있는 것들 안에서, 진정으로 하나님의 율법이던 것을 선택한다. 그는 기초가 되는 것들을 취하고 모든 나머지 것들은 버린 다음, 이들 기초로서 자신의 영원한 율법의 내용들과 결합한다. 모든 것을 파괴할 필요는 없지만, 필연적으로 율법은, 그것은 모든 부분들에서 똑같이 의무적으로 여겨지고 있던 것으로, 파괴된다. 그리스도는 이 일을 행한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율법이라고 여겨지는 것을 파괴했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았으며, 이 일 때문에 처형된다. 그러나 그의 가르침은 그의 제자들 사이에 남아 있으며 다른 사회와 다른 시대로 전해진다. 그러나 이런 다른 사회와 다른 시대들 안에서 그 새로운 가르침이 다시 유사한 군더더기와, 해석들, 그리고 설명들로서 지나치게 비대해진다- 다시금 사람의 조작들이 하나님의 계시를 바꾸어 버린다. 우리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대신에 ‘그것은 우리와 성령을 기쁘게 하나이다’를 듣게 된다, 그리고 다시 문자가 정신을 가린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그가 거부할 수 밖에 없었던 그 모든 torah (성문 율법으로서의 의미에서)와 관련된다는 것이다. torah 는 그의 진리의 영의, 성령의 계시의 산물로서 받아들여지며, 그리스도 자신이 자기 자신의 계시의 그물에 잡혀서 전체 가르침은 수포로 돌아간다.

So that is why, after 1800 years, so strange a thing befell me as to have to discover the meaning of Christ's teaching as though it were something new.

그래서 이것이, 1800년 뒤에, 너무나 이상한 일이 내게 일어나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의미를 마치 그것이 전혀 새로운 것인 것처럼 발견해야만 하였는가의 이유이다.

I did not have to discover it, but I had to do what has been done and is being done by all who seek God and His law: to disentangle the eternal law of God from among all the other things people have called by that name.

나는 그것을 발견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율법을 찾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 의해서 행해져 오고 있었으며, 행해지고 있는 것을 해야만 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율법이라고 부르고 있는 다른 모든 것들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율법을 풀어 내는 것이다.

   
       
   

 ] 위로 ] 서문 ] I. 복음 교훈의 열쇠 ] II. 무저항의 명령 ] III. 하나님의 법과 사람의 법 ] IV. 그리스도 가르침의 오해 ] [ V. 예수와 모세의 율법 ] VI. 다섯 가지 계명 ] VII. 거짓 교리 ] VIII. 삶의 길 ] IX. 신앙과 행위 ] X. 나의 멍에는 가볍다 ] XI. 죽은 교회 ] XII. 신앙이란 무엇인가? ] Notes ] Maude의 서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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