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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KINGDOM OF GOD 
IS WITHIN YOU.”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by Leo Tolstoy

   
   
CHAPTER XII.  12  

CONCLUSION-REPENT YE, FOR THE KINGDOM OF HEAVEN IS AT HAND.

결론-회개하라, 하나님의 왕국이 가까웠느니라.

5.

5. Can Man Make this Effort?-According to the Hypocritical Theory of the Day, Man is not Free to Transform his Life-Man is not Free in his Actions, but he is Free to Admit or to Deny the Truth he Knows-When Truth is Once Admitted, it Becomes the Basis of Action-Man's Threefold Relation to Truth-The Reason of the Ap­parent Insolubility of the Problem of Free Will-Man's Freedom Con­sists in the Recognition of the Truth Revealed to him. There is no Other Freedom-Recognition of Truth Gives Freedom, and Shows the Path Along which. Willingly or Unwillingly by Mankind, Man Must Advance-The Recognition of Truth and Real Freedom Enables Man to Share in the Work of God, not as the Slave, but as the Creator of Life-Men Need only Make the Effort to Renounce all Thought of Bettering the External Conditions of Life and Bend all their Efforts to Recognizing and Preaching the Truth they Know, to put an End to the Existing Miserable State of Things, and to Enter upon the Kingdom of God so far as it is yet Accessible to Man-All that is Needed is to Make an End of Lying and Hypocrisy-But then what Awaits us in the Future?-What will Happen to Humanity if Men Follow the Dic­tates of their Conscience, and how can Life go on with the Conditions of Civilized Life to which we are Accustomed?-All Uneasiness on these Points may be Removed by the Reflection that Nothing True and Good can be Destroyed by the Realization of Truth, but will only be Freed from the Alloy of Falsehood.

5. 사람은 이런 노력을 할 수 있을까?-시대의 위선적인 이론에 따르면, 사람은 자신의 삶을 변형할 자유가 없다-사람들은 자신의 행동들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그가 알고 있는 진리를 자유로이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다-일단 진리가 받아들여 지면, 그것은 행위의 기초가된다-자유 의지의 문제에 대한 명백한 수수께끼의 이유-사람의 자유는 그에게 밝혀진 진리를 인식함에 있다. 다른 자유는 없다-진리의 인식은 자유를 준다, 그리고 의지든 비의지든 인류에 의해서 사람이 반드시 전진해야 하는 길을 보여준다-진리의 인식과 진정한 자유는 사람이 하나님의 일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준다, 노예로서가 아니라, 삶의 창조자로서- 기존의 불행한 사물의 상태를 끝내려면, 그리고 아직 사람들에게 가능할 때에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 가려면, 사람들은 오직 외적인 삶을 향상시키고자하는 모든 생각을 버리고자 하는 노력을 해야할 필요가 있으며, 그들의 모든 노력을 그들이 알고 있는 진리를 인식하고 전파하는데 기울이여야 한다-필요한 모든 것은 거짓과 위선을 중단하는 것이다-그러면 미래에는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가?-사람들이 그들의 양심의 명령을 듣는다면 인류에게 무엇이 일어날 것인가, 그리고 삶은 어떻게 우리가 적응해온 문명화된 삶의 상황들에 지속할 수 있는가?-이런 점들에 대한 모든 불편함은 진리의 인식에 의해서 진실한 것과 선한 것은 파괴될 수 없으며, 오직 거짓과의 결합에서 자유로와 질 수 있다는 생각으로서 제거될 수 있다.

There was recently held at Petersburg an international exhibition of instruments of torture, handcuffs, models of solitary cells, that is to say instruments of torture worse than knouts or rods, and sensitive ladies and gentlemen went and amused themselves by looking at them.

최근에 페테스부르크에서는 고문, 수갑들, 독방들의 모형, , 채찍이나 몽둥이들 보다 더 잔혹한 고문 기구들의 국제 전시회가 있었는데, 민감한 부인들과 신사들이 와서는 그것들을 바라봄으로써 즐거워 했다.

No one is surprised that together with its recognition of liberty, equality, and fraternity, liberal science should prove the necessity of war, punishment, customs, the censure, the regulation of prostitution, the exclusion of cheap foreign laborers, the hindrance of emigration, the justifiableness of colonization, based on poisoning and destroying whole races of men called savages, and so on.

자유, 평등, 그리고 인류애와 동시에, 자유 과학이 야만인들이라고 불리는 전체 인류들을 중독 시키고 파괴하는 등을 기초로 하여, 전쟁, 처벌, 관세, 검열, 매춘의 통제, 값싼 외국 노동자의 추방, 이민의 금지, 식민지화의 정당화의 필요성을 증명함에 놀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People talk of the time when all men shall profess what is called Christianity (that is, various professions of faith hostile to one another), when all shall be well-fed and clothed, when all shall be united from one end of the world to the other by telegraphs and telephones, and be able to communicate by balloons, when all the working classes are permeated by socialistic doctrines, when the Trades Unions possess so many millions of members and so many millions of rubles, when everyone is educated and all can read newspapers and learn all the sciences.

사람들은 기독교라고 불리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고백 (, 서로에게 적대적인 다양한 신앙의 고백들)하는 때, 모든 사람들이 풍족하게 먹고 입는 때, 모든 사람들이 세상 끝에서 끝가지 전신이나 전화로 연합하고 기구로서 통신할 수 있는 때, 모든 노동 계급들이 사회주의적인 교리들로 충만한 때, 노조들이 무수히 많은 수백만의 회원들과 무수히 많은 루불을 소유하는 때, 모든 사람들이 교육 받고 모든 사람들이 신문을 읽을 수 있으며 모든 과학들을 배울 수 있는 때를 이야기한다.

But what good or useful thing can come of all these im­provements, if men do not speak and act in accordance with what they believe to be the truth?

그러나 만일 사람들이 그들이 진리라고 믿는 것에 따라서 말하고 행동하지 않는다면, 이 모든 개선들로써 무슨 훌륭하거나 유익한 것이 이루어 질 수 있는가?

The condition of men is the result of their disunion. Their disunion results from their not following the truth which is one, but falsehoods which are many. The sole means of uniting men is their union in the truth. And therefore the more sincerely men strive toward the truth, the nearer they get to unity.

사람들의 처지는 그들의 분열의 결과이다. 그들의 분열은 하나뿐인 진리를 따르지 않고 많은 거짓들을 따름으로써 초래된다. 사람들을 연합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의 진리 안에서의 연합이다. 그리고 그러므로 사람들이 진실하게 진리를 향해 노력하면 할수록, 그들은 연합으로 더욱 가까워 진다.

But how can men be united in the truth or even approx­imate to it, if they do not even express the truth they know, but hold that there is no need to do so, and pretend to regard as truth what they believe to be false?

그러나 만일 사람들이 심지어 자신들이 알고 있는 진리를 표현조차 하지 않고,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며, 그리고 그들이 거짓이라고 믿는 것을 진리인 것처럼 여긴다면, 그들은 어떻게 진리 안에서 연합하거나 심지어 그것에 근접할 수 있겠는가?

And therefore no improvement is possible so long as men are hypocritical and hide the truth from themselves, so long as they do not recognize that their union and there­fore their welfare is only possible in the truth, and do not put the recognition and profession of the truth revealed to them higher than everything else.

그리고 그러므로 사람들이 위선적이며 스스로에게 진리를 숨기는 한, 그들이 자신들의 연합과 그러므로 자신들의 복지가 오직 진리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그들에게 밝혀진 진리의 인식과 고백을 무엇보다도 높이 두지 않는 한, 어떠한 개선도 가능하지 않다.

All the material improvements that religious and scien­tific men can dream of may be accomplished; all men may accept Christianity, and all the reforms desired by the Bellamys may be brought about with every possible addi­tion and improvement, but if the hypocrisy which rules nowadays still exists, if men do not profess the truth they know, but continue to feign belief in what they do not be­lieve and veneration for what they do not respect, their condition will remain the same, or even grow worse and worse. The more men are freed from privation; the more telegraphs, telephones, books, papers, and journals there are; the more means there will be of diffusing inconsistent lies and hypocrisies, and the more disunited and conse­quently miserable will men become, which indeed is what we see actually taking place.

종교적이며 과학적인 사람들이 꿈꿀 수 있는 모든 물질적인 진보들은 달성될지도 모른다; 모든 사람들이 기독교를 받아 들일지 모른다, 그리고 벨라미스가 원하던 모든 개혁들이 가능한 모든 첨가와 개선으로서 달성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일 오늘날을 지배하는 위선이 여전히 존재한다면, 만일 사람들이 자신들이 알고 있는 진리를 고백하지 않고서,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을, 그들이 존중하지 않는 것에 대한 존경을 가장한다면, 그들의 상태는 여전히 똑같이 유지 될 것이거나, 심지어 점점 더 악화될 것이다. 사람들이 궁핍에서 자유로워지면 질수록; 전신들, 전화들, 책들, 신문들, 그리고 잡지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모순되는 퍼져가는 거짓말들과 위선들의 방법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사람들은 더욱 더 분열되고 결국은 불행하게 될 것이며, 이것은 사실 우리가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있는 것이다.

All these material reforms may be realized, but the posi­tion of humanity will not be improved. But only let each man, according to his powers, at once realize in his life the truth he knows, or at least cease to support the falsehoods he is supporting in the place of the truth, and at once, in this year 1893, we should see such reforms as we do not dare to hope for within a century-the emancipation of men and the reign of truth upon earth.

이 모든 물질적인 개혁들은 실현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류의 처지는 개선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당장, 1893년 올해에, 자신의 힘들에 의해서, 오직 각자의 사람이 당장 자신의 삶에서 자신이 알고 있는 진실을 깨닫는다면, 또는 적어도 진리를 대신하여 자신이 지지하고 있는 거짓을 지지함을 중지한다면, 우리는 한 세기 안에 우리가 감히 희망할 수 없는 그런 개혁들 -사람들의 해방과 지상 위에 진리의 지배-을 목격할 것이다.

Not without good reason was Christ's only harsh and threatening reproof directed against hypocrites and hypoc­risy. It is not theft nor robbery nor murder nor fornica­tion, but falsehood, the special falsehood of hypocrisy, which corrupts men, brutalizes them and makes them vin­dictive, destroys all distinction between right and wrong in their conscience, deprives them of what is the true meaning of all real human life, and debars them from all progress toward perfection.

위선자들과 위선을 향한 그리스도의 유일하게 거칠고 위협적인 질책은 정당한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도둑질도 아니고, 강도질도 아니고, 살인도 아니라, 거짓, 위선이라는 특별한 거짓이었으며, 그것들은 사람들을 부패 시키고, 그들을 짐승처럼 만들어서, 그들에게 복수심을 갖게 하며, 그들의 양심 안에서 선과 악에 대한 모든 구별을 파괴하며, 그들에게서 모든 진정한 인류의 삶의 참된 의미를 빼앗으며, 그들에게서 완벽을 향한 모든 진보를 가로막는다.

Those who do evil through ignorance of the truth pro­voke sympathy with their victims and repugnance for their actions, they do harm only to those they attack; but those who know the truth and do evil masked by hypocrisy, injure themselves and their victims, and thousands of other men as well who are led astray by the falsehood with which the wrongdoing is disguised.

진리에 대한 무지로서 악을 행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희생자들에 대한 동정과, 그들의 행동들에 대한 반감을 불러 일으키며, 그들은 오직 그들이 공격하는 사람들에게 해를 준다; 그러나 진리를 알고 있으며 위선의 가면을 쓰고 악을 행하는 사람들은, 자신들과 그들의 희생자들, 그리고 그 악행이 위장하고 있는 거짓에 의해 어긋난 수천의 사람들 마저 상하게 한다.

Thieves, robbers, murderers, and cheats, who commit crimes recognized by themselves and everyone else as evil, serve as an example of what ought not to be done, and deter others from similar crimes. But those who commit the same thefts, robberies, murders, and other crimes, dis­guising them under all kinds of religious or scientific or humanitarian justifications, as all landowners, merchants, manufacturers, and government officials do, provoke others to imitation, and so do harm not only to those who are directly the victims of their crimes, but to thousands and millions of men whom they corrupt by obliterating their sense of the distinction between right and wrong.

도둑들, 강도들, 살인자들, 그리고 사기꾼들, 이들은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악이라고 인정된 범죄들을 저지르며, 행하지 말아야 될 것의 예가 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유사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을 억제한다. 그러나 똑 같은 도둑질, 강도질, 살인들 및 기타 범죄들을 저지르는 사람들은, 모든 종류의 종교적 또는 과학적 또는 인류애적인 구실아래 위장하면서, 마치 모든 지주들, 상인들, 제조업자들, 및 정부 관리들이 그러하듯이,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모방하도록 유도하고, 그렇게 해서 그들 범죄의 직접적인 희생자들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서 선 과 악에 대한 구별 감각을 없애 버림으로써 그들이 부패 시키는 수천 수백만의 사람들을 해롭게 한다.

A single fortune gained by trading in goods necessary to the people or in goods pernicious in their effects, or by financial speculations, or by acquiring land at a low price the value of which is increased by the needs of the popula­tion, or by an industry ruinous to the health and life of those employed in it, or by military or civil service of the state, or by any employment which trades on men's evil instincts-a single fortune acquired in any of these ways, not only with the sanction, but even with the approbation of the leading men in society, and masked with an ostenta­tion of philanthropy, corrupts men incomparably more than millions of thefts and robberies committed against the recognized forms of law and punishable as crimes.

사람들에게 필요하거나 그 효용에 있어서 해로운 상품의 거래에 의해서, 또는 금전의 투기, 또는 인구의 필요들에 의해서 상승되는 가치보다 낮은 값으로 토지를 차지하거나, 또는 고용된 사람들의 건강과 생명에 해로운 산업에 의해서, 또는 국가의 병역의무나 공무에 의해서, 또는 사람들의 악한 본능들을 이용하는 어떠한 고용에 의해서 얻어지는 단 한가지의 재산도-이들 방법들 중의 어느 것에 의해서라도 형성되었으며, 그에 대한 인가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사회의 유력 인사들의 승인으로서, 그리고 겉치레의 인류애의 가면을 쓴, 단 한 가지의 재산이라도, 인정된 법의 형태들과 범죄로서 처벌되는 수백만의 도둑질과 강도질 보다도 더 비교할 수 없이 사람들을 부패 시킨다.

A single execution carried out by prosperous educated men uninfluenced by passion, with the approbation and assistance of Christian ministers, and represented as some­thing necessary and even just, is infinitely more corrupting and brutalizing to men than thousands of murders com­mitted by uneducated working people under the influence of passion. An execution such as was proposed by Joukovsky, which would produce even a sentiment of religious emotion in the spectators, would be one of the most per­verting actions imaginable. (See vol. iv. of the works of Joukovsky.)

기독교 성직자들의 승인과 협조로서, 감정에 흔들리지 않는 훌륭한 교육을 받은 사람들에 의해서 집행되고, 필요하며 심지어 정당한 어떤 것으로 여겨지는 단 하나의 처형이라도, 감정에 영향에 좌우되는 교육 받지 못한 노동하는 사람들이 저지른 수천의 살인 보다도 더욱 사람들에게 부패적이고 야만적이다. 쥬코브스키가 제안한 처형은, 심지어 관중들에게 종교적인 감정의 정서를 불러오는 것으로,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타락적인 행위들 중의 하나였다. (쥬코브스키의 작품 4권을 보라.)

Every war, even the most humanely conducted, with all its ordinary consequences, the destruction of harvests, robberies, the license and debauchery, and the murder with the justifications of its necessity and justice, the exaltation and glorification of military exploits, the worship of the flag, the patriotic sentiments, the feigned solicitude for the wounded, and so on, does more in one year to pervert men's minds than thousands of robberies, murders, and arsons perpetrated during hundreds of years by individual men under the influence of passion.

모든 전쟁은, 아무리 자비스럽게 수행된다고 하더라도, 그 평범한 결과들로서, , 농작물의 파괴, 강도질, 방탐과 난봉, 그리고 필요와 정의를 구실로 하는 살인, 군대의 업적에 대한 칭송과 찬미, 국기에 대한 숭배, 애국적인 감정들, 부상자들에 대한 겉치레의 염려 등으로서, 사람들의 마음들을 타락시킴이 일년에 행해지는 것이 개인적인 사람들에 의해 감정에 좌우되어서 수백 년 동안 자행되는 강도질, 살인, 그리고 방화들 보다 더 크다.

The luxurious expenditure of a single respectable and so-called honorable family, even within the conventional limits, consuming as it does the produce of as many days of labor as would suffice to provide for thousands living in privation near, does more to pervert men's minds than thousands of the violent orgies of coarse tradespeople, officers, and workmen of drunken and debauched habits, who smash up glasses and crockery for amusement.

단 하나의 존경 받는 소위 귀족 가문의 사치스러운 지출이라도, 심지어 관습적인 한계 안에서일지라도, 근처에서 굶주리고 있는 수천의 사람들을 먹이기에 충분한 정도의 노동 일 수 만큼을 소모하는 것으로서, 재미로서 유리와 그릇들을 부수는 수천의 거친 상인들, 술 취하고 방탕한 습관의 노동자들의 난폭한 흥청거림보다 사람들의 마음들을 더욱 타락시키게 만든다.

One solemn religious procession, one service, one sermon from the altar-steps or the pulpit, in which the preacher does not believe, produces incomparably more evil than thousands of swindling tricks, adulteration of food, and so on.

단 한 번의 엄숙한 종교적 행렬, 단 한번의 예배, 설교자가 이것을 믿지도 않으면서, 제단이나 설교단에서 행하는 단 한 번의 설교라도, 수천의 사기적인 속임수, 불량 음식, 등등 보다도 더욱 비교할 수 없으리 만치 많은 악을 만들어 낸다.

We talk of the hypocrisy of the Pharisees. But the hypocrisy of our society far surpasses the comparatively innocent hypocrisy of the Pharisees. They had at least an external religious law, the fulfillment of which hindered them from seeing their obligations to their neighbors. Moreover, these obligations were not nearly so clearly defined in their day. Nowadays we have no such religious law to exonerate us from our duties to our neighbors (I am not speaking now of the coarse and ignorant persons who still fancy their sins can be absolved by confession to a priest or by the absolution of the Pope). On the contrary, the law of the Gospel which we all profess in one form or another directly defines these duties. Besides, the duties which had then been only vaguely and mystically expressed by a few prophets have now been so clearly formulated, have become such truisms, that they are repeated even by schoolboys and journalists. And so it would seem that men of today cannot pretend that they do not know these duties.

우리는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말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위선은 바리새인들의 비교적 순수한 위선을 훨씬 능가한다. 그들에게는 적어도 외적인 종교적인 율법이 있었으며, 그것의 성취가 그들의 이웃들에 대한 자신들의 의무들을 깨달음을 방해하였다. 게다가, 이들 의무들은 그들의 시대에 거의 그렇게 정확하게 정의되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의 이웃들에 대한 우리의 의무들을 면제하여 주는 그런 종교적인 율법이 우리에겐 없다 (나는 지금 그들의 죄가 사제들에게 고백함이나 교황의 면죄에 의해서 사면될 수 있다고 아직도 상상하는 거칠고 무지한 사람들을 말하고 있지 않다). 반대로, 우리 모두가 이런 저런 형태로 고백하는 복음서의 율법은 이런 의무들을 직접적으로 정의하고 있다. 게다가, 몇몇 선지자들에 의해서 오직 모호하고 신비스럽게 표현되었던 의무들이 지금은 너무나 명백하게 나타나 있으며, 너무나 진부한 것이 되어서, 그것들은 심지어 학생들이나 대중 작가들도 인용하고 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의 사람들은 그들이 이 의무들을 모르고 있는 척할 수가 없어 보인다.

A man of the modern world who profits by the order of things based on violence, and at the same time protests that he loves his neighbor and does not observe what he is doing in his daily life to his neighbor, is like a brigand who has spent his life in robbing men, and who, caught at last, knife in hand, in the very act of striking his shrieking victim, should declare that he had no idea that what he was doing was disagreeable to the man he had robbed and was prepared to murder. Just as this robber and murderer could not deny what was evident to everyone, so it would seem that a man living upon the privations of the oppressed classes cannot persuade himself and others that he desires the welfare of those he plunders, and that he does not know how the advantages he enjoys are obtained.

폭력에 기초한 세상 질서에 의해서 이익을 보면서, 동시에 자신이 그의 이웃을 사랑한다고 주장하며, 자신의 생애에서 그의 이웃에게 행하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현대 세계의 사람은, 마치 사람들을 강탈함에 그의 평생을 보내고, 손에 칼을 들고서, 비명을 지르는 희생자에게 내리치려는 순간에 붙잡혀서는, 그가 하고 있는 행위가 그가 강도질 하고 살해하려는 사람에게 해로움을 주는 것인지 몰랐다고 주장하는 강도와 같다. 이런 강도와 살인자가 모든 사람에게 명백한 것을 부인할 수 없는 것처럼, 억압 받는 계층들을 약탈함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그가 약탈하는 사람들의 행복을 바라며, 그가 누리고 있는 이익들이 어떻게 얻어지는 것인지 모른다고 확신시킬 수가 없다.

It is impossible to convince ourselves that we do not know that there are a hundred thousand men in prison in Russia alone to guarantee the security of our property and tranquility, and that we do not know of the law tribunals in which we take part, and which, at our initiative, condemn those who have attacked our property or our security to prison, exile, or forced labor, whereby men no worse than those who condemn them are ruined and corrupted; or that we do not know that we only possess all that we do possess because it has been acquired and is defended for us by murder and violence.

우리는 러시아 하나 만으로도, 우리의 재산과 평안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서 수만 명의 사람들이 감옥에 있다는 것을 모르며, 우리가 참석하는 법정을 모르며, 그곳에서는 우리가 주체가 되어서 우리의 재산이나 우리의 안전을 위협한 사람들을 감옥, 추방, 도는 강제노동에 선고하며, 그럼으로써, 사람들은 그들을 정죄하는 사람과 똑같이 멸망하고 부패됨을 모른다고; 또는 우리는 살인과 폭력으로서 획득되어지고 수호 됨으로써, 우리가 소유하는 모든 것을 오직 소유할 뿐이라는 것을 모른다고 우리 스스로를 확신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We cannot pretend that we do not see the armed police­man who marches up and down beneath our windows to guarantee our security while we eat our luxurious dinner, or look at the new piece at the theater, or that we are unaware of the existence of the soldiers who will make their appearance with guns and cartridges directly our property is attacked.

우리가 화려한 식사를 할 때에 또는 극장에서 새로운 작품을 구경하는 동안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서, 우리의 아래에서 오르락 내리락 행군하는 무장한 경찰관을 우리가 보지 못한다고 하거나, 우리의 재산이 공격 당하자마자 총과 탄약들을 휴대하고 나타나는 병사들의 존재를 모르는 것처럼 행동할 수 없다.

We know very well that we are only allowed to go on eating our dinner, to finish seeing the new play, or to enjoy to the end the ball, the Christmas fete, the promenade, the races or the hunt, thanks to the policeman's revolver or the soldier's rifle, which will shoot down the famished out­cast who has been robbed of his share, and who looks round the corner with covetous eyes at our pleasures, ready to interrupt them instantly, were not the policeman and the soldier there prepared to run up at our first call for help.

우리가 도움 요청을 부르짖자 마자 달려 올 경찰관과 병사들이 아니라면, 자신의 몫을 강탈당하고, 주변을 배회하며 우리들의 쾌락을 탐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면서, 금방이라도 시비를 걸 것 같은 굶주린 부랑아를 쏘아서 넘어뜨리는 경찰관의 권총이나 병사들의 소총의 도움 덕택으로, 우리는 오직 만찬에서 식사를 할 수 있고, 새로운 연극을 마지막까지 볼 수 있으며, 무도회를 끝까지 즐길 수 도 있으며, 크리스마스 축제, 산책, 경주들이나 사냥을 즐길 수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And therefore just as a brigand caught in broad daylight in the act cannot persuade us that he did not lift his knife in order to rob his victim of his purse, and had no thought of killing him, we too, it would seem, cannot persuade our­selves or others that the soldiers and policemen around us are not to guard us, but only for defense against foreign foes, and to regulate traffic and fetes and reviews; we cannot persuade ourselves and others that we do not know that men do not like dying of hunger, bereft of the right to gain their subsistence from the earth on which they live; that they do not like working underground, in the water, or in stifling heat, for ten to fourteen hours a day, at night in factories to manufacture objects for our pleasure. One would imagine it impossible to deny what is so obvious. Yet it is denied.

그리고 그러므로 환한 대낮에 현장에서 붙잡힌 강도가 그의 희생자로부터 지갑을 빼앗기 위해서 그의 칼을 들지 않았다고, 그들 죽일 생각이 없었다고 우리에게 설득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 역시도 자신에게나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 주변의 병사들이나 경찰관들이 우리를 지키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외국에 있는 원수들에 대해 방어하기 위해서, 그리고 교통이나 축제, 그리고 병사들의 열병식을 통제하기 위해 있다고 주장할 수 없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지상에서 그들의 생계 수단을 얻을 권리를 박탈당하고서 굶어 죽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의 쾌락을 위한 물건 들을 제조하는 공장들에서 밤 중에 하루 10 내지 14 시간을 땅 속에서, 물 속에서, 또는 질식하는 열기 속에서 일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가 모른다고 자신에게나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할 수가 없다. 우리는 그렇게 명백한 것을 부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상상한다. 그러나 그것은 부인되고 있다.

Still, there are, among the rich, especially among the young, and among women, persons whom I am glad to meet more and more frequently, who, when they are shown in what way and at what cost their pleasures are purchased, do not try to conceal the truth, but hiding their heads in their hands, cry: "Ah! Don't speak of that. If it is so, life is impossible." But though there are such sincere people who even though they cannot renounce their fault, at least see it, the vast majority of the men of the modern world have so entered into the parts they play in their hypocrisy that they boldly deny what is staring everyone in the face.

아직도, 부자들 가운데는, 특별히 젊은이들 가운데, 그리고 여성들 가운데, 내가 점점 자주 즐거이 만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그들은, 어떤 방법으로 그리고 어떤 비용으로 그들의 쾌락이 사들여지는지 보게 되면, 진리를 숨기려 시도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머리들을 손 안에 숨기면서, 소리 지른다: “! 그렇게 말씀하지 마십시오. 만일 그렇다면, 삶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비록 그들의 잘못을 단념하지 않지만 적어도 그것을 이해하는 그렇게 진실한 사람들이 있지만, 현대 세계의 엄청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위선 안에서 그들이 담당하고 있는 역할들에 너무나 파고 들어서 그들은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 빤히 보이는 것을 대담하게 부인한다.

"All that is unjust," they say; "no one forces the people to work for the landowners and manufacturers. That is an affair of free contract. Great properties and fortunes are necessary, because they provide and organize work for the working classes. And labor in the factories and workshops is not at all the terrible thing you make it out to be. Even if there are some abuses in factories, the government and the public are taking steps to obviate them and to make the labor of the factory workers much easier, and even agreeable. The working classes are accustomed to physical labor, and are, so far, fit for nothing else. The poverty of the people is not the result of private property in land, nor of capitalistic oppression, but of other causes: it is the result of the ignorance, brutality, and intemperance of the people. And we men in authority who are striving against this impoverishment of the people by wise legisla­tion, we capitalists who are combating it by the extension of useful inventions, we clergymen by religious instruc­tion, and we liberals by the formation of trades unions, and the diffusion of education, are in this way increasing the prosperity of the people without changing our own positions. We do not want all to be as poor as the poor; we want all to be as rich as the rich. As for the assertion that men are ill treated and murdered to force them to work for the profit of the rich, that is a sophism. The army is only called out against the mob, when the people, in ignorance of their own interests, make disturbances and destroy the tranquility necessary for the public welfare. In the same way, too, it is necessary to keep in restraint the malefactors for whom the prisons and gallows are established. We ourselves wish to suppress these forms of punishment and are working in that direction."

그들은 말한다, “그 모든 것은 부당하다, 아무도 사람들에게 지주들과 제조업자들을 위해서 노동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유 계약의 문제이다. 엄청난 재산들과 큰 돈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노동자 계급들을 위해서 일거리를 준비하고 조직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장들과 작업장들에서의 노동은 당신이 그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전혀 무서운 것이 아니다. 비록 공장들에서 약간의 혹사가 있다고 하더라고, 정부와 대중은 그것들을 피해갈 방도들을 취하고 있으며, 그리고 공장 노동자들의 노동을 훨씬 쉽도록, 그리고 심지어 쾌적하게 만들고 있다. 노동자 계급들은 육체 노동에 적응되어 있으며, 여태까지 다른 어떤 것에도 적합하지 않다. 사람들의 가난은 토지에 대한 사유 재산이나, 자본주의적인 억압의 결과가 아니라 다른 원인들에 있다: 그것은 사람들의 무지, 잔인함, 그리고 무절제의 결과이다. 그리고 지혜로운 입법에 의해서 사람들의 가난과 싸우는 권력을 쥐고 있는 우리 사들은, 유익한 발명들의 확장을 통하여 그것과 싸우고 있는 우리 자본가들은, 종교적인 가르침을 가진 우리 성직자들은, 그리고 노동 조합의 형성과 교육의 확산을 추구하는 우리 자유주의자들은, 이렇게 해서 우리 자신의 지위들을 변화시키지 않고서도 사람들의 번영을 증대 시키고 있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 만큼 가난해 지기를 바라지 않는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부자들 만큼 부유해 지기를 바란다. 사람들이 부유한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노동하도록 학대 당하고 살해당한다는 주장에 관한 한, 그것은 궤변이다. 군대는,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관심들에 대한 무지로 인해서, 소란을 피우고 공공의 복지를 위해 필요한 평안을 파괴할 때, 오직 폭도들을 진압하기 위해서 소집된다. 똑 같은 방법으로, 악행자들을 제지하는 것은 필요하며, 그들을 위해서 감옥들과 교수대가 세워진다. 우리 자신은 이런 처벌 형태들을 억제하고자 하며 그 방향으로 노력하고 있다.”

Hypocrisy in our day is supported on two sides: by false religion and by false science. And it has reached such proportions that if we were not living in its midst, we could not believe that men could attain such a pitch of self-deception. Men of the present day have come into such an extraordinary condition, their hearts are so hardened, that seeing they see not, hearing they do not hear, and understand not.

우리 시대의 위선은 두 진영에서 지지 된다: 거짓된 종교와 거짓된 과학이다. 그리고 그것은 만일 우리가 그것들 안에서 살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사람들이 그토록 심각한 자기 기만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고 믿을 수 없는 정도에 도달했다. 현 시대의 사람들은 그토록 이상한 상태에 도달했으며, 그들의 마음은 너무나 완악해져서, 그들은 보려 하지만 보지 못하고, 들으려 하지만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한다.

Men have long been living in antagonism to their con­science. If it were not for hypocrisy they could not go on living such a life. This social organization in opposition to their conscience only continues to exist because it is dis­guised by hypocrisy.

사람들은 오랫동안 그들의 양심과 반목하며 살아가고 있다. 만일 위선이 아니었다면, 그들은 그러한 삶을 살아 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의 양심에 대치되는 이런 사회적 조직은 그것이 위선에 의해서 위장되기 때문에 오직 계속해서 존재한다.

And the greater the divergence between actual life and men's conscience, the greater the extension of hypocrisy. But even hypocrisy has its limits. And it seems to me that we have reached those limits in the present day.

그리고 실제의 삶과 사람들의 양심의 갈라짐이 크면 클수록, 위선의 영역도 커진다. 그러나 심지어 위선도 그 한계가 있다. 그리고 우리는 현 시대에 그 한계에 도착했다는 것이 내게 느껴진다.

Every man of the present day with the Christian princi­ples assimilated involuntarily in his conscience, finds him­self in precisely the position of a man asleep who dreams that he is obliged to do something which even in his dream he knows he ought not to do. He knows this in the depths of his conscience, and all the same he seems unable to change his position; he cannot stop and cease doing what he ought not to do. And just as in a dream, his position becoming more and more painful, at last reaches such a pitch of intensity that he begins sometimes to doubt the reality of what is passing and makes a moral effort to shake off the nightmare which is oppressing him.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양심에 기독교적인 원리들을 흡수한 현 시대의 모든 사람은, 심지어 자신의 꿈 속에서도 그가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알고 있는 무엇인가를 행해야만 하는 것을 꿈꾸며 잠들어 있는 사람의 상태와 똑같음을 발견한다. 그는 그의 양심 깊은 곳에서 이것을 안다, 그리고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상태를 변화할 수 없어 보인다; 그는 그가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행함을 멈추고 중지할 수 없다. 그리고 꿈에서와 마찬가지로, 그의 위치는 점점 더 고통스러워지며, 마침내 너무나 심한 지경에 이르러서 그는 때때로 일어 나고 있는 것의 현실을 의심하기 시작하며 그를 억누르고 있는 악몽을 떨쳐버리려고 도덕적인 노력을 시도한다.

This is just the condition of the average man of our Christian society. He feels that all that he does himself and that is done around him is something absurd, hideous, impossible, and opposed to his conscience; he feels that his position is becoming more and more unendurable and reaching a crisis of intensity.

이것이 바로 우리 기독교 사회의 보통사람의 상황이다. 그는 자신이 행하며 그의 주변에서 행해지는 모든 것은 무엇인가 불합리하며, 무섭고, 불가능하며, 그의 양심에 대치된다는 것을 느낀다; 그는 자신의 처지가 점점 더 참을 수 없으며 극도의 위기에 도달함을 느낀다.

It is not possible that we modern men, with the Christian sense of human dignity and equality permeating us soul and body, with our need for peaceful association and unity between nations, should really go on living in such a way that every joy, every gratification we have is bought by the sufferings, by the lives of our brother men, and more­over, that we should be every instant within a hair's-breadth of falling on one another, nation against nation, like wild beasts, mercilessly destroying men's lives and labor, only because some benighted diplomatist or ruler says or writes some stupidity to another equally benighted diplomatist or ruler.

우리 현대인들이,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의 기독교적인 의미가 우리의 영혼과 몸에 스며들어 있으며, 국가 간의 평화로운 교류와 연합의 필요를 느끼면서도, 정말 그런 방법으로 삶을 살아감으로 인해서, 우리가 가지는 모든 즐거움, 모든 만족들이 우리의 동포들의 고통과 목숨으로 얻어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으며, 그리고 이뿐만 아니라, 우리가 매 순간 마다 서로를 공격할 지척의 거리 안에 있으며, 국가가 국가를 대적하며, 마치 들짐승들처럼, 사람들의 목숨들과 노동을 무자비하게 파괴하고, 이것이 오직 무지한 어떤 외교관이나 통지자가 똑같이 다른 무지한 외교관이나 통치자에게 어떤 어리석은 것을 말하거나 기록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It is impossible. Yet every man of our day sees that this is so and awaits the calamity. And the situation becomes more and more insupportable.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모든 사람들은 이것은 그러하다는 것을 알며 재앙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그 상황은 점점 더 지탱할 수 없게 된다.

And as the man who is dreaming does not believe that what appears to him can be truly the reality and tries to wake up to the actual real world again, so the average man of modern days cannot in the bottom of his heart believe that the awful position in which he is placed and which is growing worse and worse can be the reality, and tries to wake up to a true, real life, as it exists in his conscience.

그리고 꿈을 꾸고 있는 사람이 자신에게 보이는 것이 진정으로 현실일 수 있다고 믿지 않으며, 다시 실제의 진정한 세상으로 깨어 나려고 애를 쓰는 것처럼, 현대의 보통 사람은 그의 마음의 바닥에서 그가 처해 있으며 점점 더 악화되는 무서운 위치가 현실일 수가 없다고 믿으며, 그의 양심에 존재하고 있는 것 같은, 진실하며 진정한 삶으로 깨어나려 애를 쓴다.

And just as the dreamer need only make a moral effort and ask himself, "Isn't it a dream?" and the situation which seemed to him so hopeless will instantly disappear, and he will wake up to peaceful and happy reality, so the man of the modern world need only make a moral effort to doubt the reality presented to him by his own hypocrisy and the general hypocrisy around him, and to ask himself, "Isn't it all a delusion?" and he will at once, like the dreamer awakened, feel himself transported from an imag­inary and dreadful world to the true, calm, and happy reality.

그리고 꿈꾸는 사람이 오직 도덕적이 노력을 하며, 자신에게, “이것이 꿈이 아닐까? 하고 스스로에게 물으면 필요가 있으며, 그러면, 그에게 너무나 희망이 없다고 느껴지는 상황이 즉시 사라질 것이고, 그는 평화스럽고 행복한 현실로 깨어나는 것처럼, 현재 세상의 사람은 오직 자기 자신의 위선과 그 주변의 일반적인 위선에 의해서 나타난 현실을 의심하려는 도덕적인 노력을 하고, “이 모든 것은 망상이 아닐까?” 하고 스스로에게 물을 필요가 있으며, 그러면, 그는 당장, 마치 꿈꾸는 사람이 깨어난 것처럼, 상상의 무서운 세상에서 진실하며, 평안하며, 행복한 현실로 옮아감을 느낄 것이다.

And to do this a man need accomplish no great feats or exploits. He need only make a moral effort.

그리고 이일을 행하기 위해서, 사람은 거대한 업적들이나 공적들을 완수할 필요는 없다. 그는 오직 도덕적인 노력을 하는 것만이 필요하다.

But can a man make this effort?

그러나 사람이 이런 노력을 할 수 있을까?

According to the existing theory so essential to support hypocrisy, man is not free and cannot change his life.

그러한 위선을 지지하는 기존의 이론에 의하면, 사람은 자유롭지 않으며, 자신의 삶을 바꿀 수 없다고 한다.

"Man cannot change his life, because he is not free. He is not free, because all his actions are conditioned by pre­viously existing causes. And whatever the man may do there are always some causes or other through which he does these or those acts, and therefore man cannot be free and change his life," say the champions of the metaphysics of hypocrisy. And they would be perfectly right if man were a creature without conscience and incapable of mov­ing toward the truth; that is to say, if after recognizing a new truth, man always remained at the same stage of moral development. But man is a creature with a con­science and capable of attaining a higher and higher degree of truth. And therefore even if man is not free as regards performing these or those acts because there exists a previous cause for every act, the very causes of his acts, consisting as they do for the man of conscience of the recognition of this or that truth, are within his own control.

“사람은 자신의 삶을 바꿀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자유롭지 못하다, 왜냐하면 그의 모든 행위는 기존에 존재하는 원인들에 위해서 좌우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이 행하는 무엇이든지 언제나 그가 이런 저런 행위들을 행하는 이런 저런 원인들이 있으며, 그러므로 사람은 자유로울 수가 없으며 자신의 삶을 바꿀 수가 없다,”라고 위선에 관한 형이상학의 옹호자들이 말한다. 그리고 사람이 양심이 없는 피조물이며 진리를 향해서 나아갈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그들은 완벽하게 옳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진리를 인식한 다음에, 사람이 언제나 도덕적 발전에서 똑 같은 단계에 머무른다면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양심을 가지고 있으며 높고 높은 진리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피조물이다. 그리고 그러므로 심지어 만일 사람이 모든 행동에 대하여 기존의 원인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런 저런 행위들을 수행함에 있어서 자유롭지 못하다면, 이런 행위들에 대한 바로 그 원인들이, 양심을 가진 사람이 이런 저런 진리를 인식함에 대해 행함으로 이루어지므로, 그 자신의 통제 안에 있다.

So that though man may not be free as regards the performance of his actions, he is free as regards the foun­dation on which they are performed. Just as the mechan­ician who is not free to modify the movement of his loco­motive when it is in motion, is free to regulate the machine beforehand so as to determine what the movement is to be.

그래서 사람이 자신의 행위들을 수행함에 있어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할 지라도, 행위들이 수행되는 기초에 대해서는 자유롭다. 이것은 마치, 기술자가 자신의 기관차가 움직일 때 그것의 움직임을 수정하는 것에 자유롭지 못하다고 할지라도, 사전에 기계를 조정하여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자유로운 것과 같다.

Whatever the conscious man does, he acts just as he does, and not otherwise, only because he recognizes that to act as he is acting is in accord with the truth, or because he has recognized it at some previous time, and is now only through inertia, through habit, acting in accordance with his previous recognition of truth.

의식을 지닌 사람이 무엇을 행하든지, 그는 그가 행하는 대로 행할 뿐이며, 다름은 없다, 오직 그 이유는, 그가 행하는 대로 행하는 것은 진리와 일치하거나, 그가 과거 언젠가 그것을 인식하였으나, 이제 오직 무능함으로, 습관에 의해서, 과거에 인식한 진리에 일치되게 행하고 있음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In any case, the cause of his action is not to be found in any given previous fact, but in the consciousness of a given relation to truth, and the consequent recognition of this or that fact as a sufficient basis for action.

어떤 경우에도, 그의 행동의 원인은 어떠한 주어진 사실에서 찾을 수 없으나, 진리에 대해 주어진 관계의 인식, 그리고 행위의 충분한 근거로서 그에 따른 이런 저런 사실의 인식에서 찾을 수 있다.

Whether a man eats or does not eat, works or rests, runs risks or avoids them, if he has a conscience he acts thus only because he considers it right and rational, because he considers that to act thus is in harmony with truth, or else because he has made this reflection in the past.

사람이 먹든 안 먹든, 일하든 휴식하든, 위험을 맞이하거나 그것들을 피하거나, 만일 그가 양심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그것이 옳으며 이성적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행동함은 진리와 일치하거나, 과거에 그가 이런 생각을 하였기 때문이다.

The recognition or non-recognition of a certain truth depends not on external causes, but on certain other causes within the man himself. So that at times under external conditions apparently very favorable for the recognition of truth, one man will not recognize it, and another, on the contrary, under the most unfavorable conditions will without apparent cause, recognize it. As it is said in the Gos­pel, "No man can come unto me, except the Father which hath sent me draw him." That is to say, the recognition of truth, which is the cause of all the manifestations of human life, does not depend on external phenomena, but on certain inner spiritual characteristics of the man which escape our observation.

특정한 진리의 인식과 비인식은 외적인 원인들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자신의 내부에 있는 특정한 다른 원인들에 의존한다. 그래서 때로는 진리의 인식에 명백히 매우 우호적인 외적인 상황들 아래서도, 어떤 사람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할 것이며, 반대로, 다른 사람은 가장 열악한 상황 아래서도, 명백한 원인이 없더라도 그것을 인식할 것이다. 그것은 복음서에 기록된 바,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와 같다. 다시 말하면, 진리의 인식은, 이것은 인간의 삶의 모든 표상들의 원인으로서, 외적인 현상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관측을 벗어나는 특정한 내적인 영적인 사람의 특성들에 의존한다.

And therefore man, though not free in his acts, always feels himself free in what is the motive of his acts-the recognition or non-recognition of truth. And he feels him­self independent not only of facts external to his own per­sonality, but even of his own actions.

그리고 그러므로, 사람은, 비록 그의 행위들에서 자유롭지 않더라도, 언제나 그의 행위들에 대한 동기-진리의 인식 또는 비인식-에 있어서 스스로 자유롭게 느낀다. 그리고 그는 자기 자신의 성격에 외적인 사실들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기 자신의 행위들에 대해서도 독립되어 있음을 느낀다.

Thus a man who under the influence of passion has committed an act contrary to the truth he recognizes, remains none the less free to recognize it or not to recog­nize it; that is, he can by refusing to recognize the truth regard his action as necessary and justifiable, or he may recognize the truth and regard his act as wrong and censure himself for it.

그리하여 감정의 영향 아래서 그가 인식하는 진리에 대치되는 행위를 범한 사람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인식함이나 인식하지 못함에 대해 자유롭다, , 그는 진리를 인식함을 거부함으로써 그의 행위를 필요하며 정당하다고 여길 수 있거나, 또는 그는 진리를 인식하고 그의 행위를 악하다고 여기고 그것에 대해서 자신을 책망할 수 도 있다.

Thus a gambler or a drunkard who does not resist temp­tation and yields to his passion is still free to recognize gambling and drunkenness as wrong or to regard them as a harmless pastime. In the first case even if he does not at once get over his passion, he gets the more free from it the more sincerely he recognizes the truth about it; in the second case he will be strengthened in his vice and will deprive himself of every possibility of shaking it off.

그리하여 유혹을 물리치지 않고 자신의 감정에 굴복하는 노름꾼이나 주정뱅이가 여전히 노름이나 술 취함을 악하다고 인식하거나 그것들을 해롭지 않은 소일거리라고 여기는 것은 자유롭다. 첫번째의 경우, 그가 당장 자신의 감정을 극복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는 그가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 지면 질수록, 그것에 대한 진리를 더 진지하게 인식할 수 있다; 두 번째의 경우에 그는 자신의 악함을 더욱 뿌리깊게 하여서 자신이 그것을 털어버릴 모든 가능성을 잃게 될 것이다.

In the same way a man who has made his escape alone from a house on fire, not having had the courage to save his friend, remains free, recognizing the truth that a man ought to save the life of another even at the risk of his own, to regard his action as bad and to censure himself for it, or, not recognizing this truth, to regard his action as natural and necessary and to justify it to himself. In the first case, if he recognizes the truth in spite of his departure from it, he prepares for himself in the future a whole series of acts of self-sacrifice necessarily flowing from this recog­nition of the truth; in the second case, a whole series of egoistic acts.

똑 같은 방법으로 불이 난 집에서 혼자만 탈출을 감행한 사람이, 그의 친구를 구할 용기가 없어도, 자유롭거나, 심지어 자기 자신의 목숨을 버려서라도 다른 사람의 목숨을 살려야 한다는 진리를 깨닫고서, 자신의 행동을 나쁘다고 여기며 그것에 대해 자신을 질책하거나, 아니면, 이런 진리를 인식하지 못하고서, 자신의 행동을 자연스러우며 필요하다고 여기면서 그것에 대해 자신을 정당화하는 것은 자유롭다. 첫번째의 경우, 만일 그가 자신이 그로부터 분리됨에도 불구하고 진리를 인식한다면, 그는 미래에 이러한 진리의 인식으로부터 필연적으로 흘러나오는 자기 희생 행위들의 전체 과정에 대비하는 것이며; 두 번째의 경우에는, 이기적인 행위들의 총체적 준비를 하는 것이다.

Not that a man is always free to recognize or to refuse to recognize every truth. There are truths which he has recognized long before or which have been handed down to him by education and tradition and accepted by him on faith, and to follow these truths has become a habit, a second nature with him; and there are truths, only vaguely, as it were distantly, apprehended by him. The man is not free to refuse to recognize the first, nor to recognize the second class of truths. But there are truths of a third kind, which have not yet become an unconscious motive of action, but yet have been revealed so clearly to him that he cannot pass them by, and is inevitably obliged to do one thing or the other, to recognize or not to recognize them. And it is in regard to these truths that the man's freedom mani­fests itself.

사람들이 언제나 모든 진리들을 인식하거나 인식하기를 거부함에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진리들 중에는 오래 전에 인식되었거나, 교육이나 전통을 통하여 그에게 전수되어 신앙으로 받아들여 지고, 이런 진리들을 따르는 것이 습관, 즉 그에게 있어서 제 2의 천성이 되어버린 것이 있다; 그리고, 마치 멀리 있는 것처럼, 그에게 모호한 인식되는 진리들도 있다. 첫번째의 것을 사람이 인식하기를 거부하는 것과 또한 두 번째 범주의 진리들도 인식함도 자유롭지 않다. 그러나 세 번째 종류의 진리들이 있는데, 그것들은 아직 행위의 무의식적인 동기가 되지 않았지만, 그에게 너무나 분명하게 밝혀져서 그는 그것들을 지나칠 수가 없으며, 필연적으로 이것이든 저것이든 행하거나, 그것들을 인식하거나 인식하지 않아야 된다. 그리고 사람의 자유가 나타나는 것은 바로 이런 진리들에 관련되어 있다.

Every man during his life finds himself in regard to truth in the position of a man walking in the darkness with light thrown before him by the lantern he carries. He does not see what is not yet lighted up by the lantern; he does not see what he has passed which is hidden in the darkness; but at every stage of his journey he sees what is lighted up by the lantern, and he can always choose one side or the other of the road.

제각기 사람은 자신의 인생에서 진리와 관련하여 자신이 지니고 있는 등으로 자기 앞을 비추며 어둠 속을 걸어가는 사람의 처지와 같다. 그는 등으로서 아직 비추지 않은 것은 보지 못한다; 그는 자신이 지나쳐서 어둠 속에 숨겨진 것을 보지 못한다; 그러나 그의 여행의 제각기 단계에서 등으로 비추어 지는 것을 본다 그리고 그는 언제나 이쪽 길이나 저쪽 길을 선택할 수 있다.

There are always unseen truths not yet revealed to the man's intellectual vision, and there are other truths out­lived, forgotten, and assimilated by him, and there are also certain truths that rise up before the light of his reason and require his recognition. And it is in the recognition or non-recognition of these truths that what we call his freedom is manifested.

사람들의 지적인 시야에 밝혀지지 않은 진리들은 언제나 있다, 그리고 낡아 빠지고, 잊혀지고 그에게 흡수된 다른 진리들도 있으며, 그리고, 또한 그의 이성의 빛 앞에 솟아나서 그의 인식을 요구하는 특정한 진리들도 있다. 그리고 소위 그의 자유가 나타나는 것은 바로 이런 진리들의 인식 또는 비인식에 있다.

All the difficulty and seeming insolubility of the question of the freedom of man results from those who tried to solve the question imagining man as stationary in his re­lation to the truth.

사람의 자유에 대한 문제의 모든 어려움과 외견상 불가해함은 사람은 진리에 대한 그의 관계에 있어서 정체되어 있다고 상상하면서 그 문제를 풀려고 시도하는 사람들로부터 초래된다.

Man is certainly not free if we imagine him stationary, and if we forget that the life of a man and of humanity is nothing but a continual movement from darkness into light, from a lower stage of truth to a higher, from a truth more alloyed with errors to a truth more purified from them.

만일 우리가 사람이 정체되어 있다고 상상한다면, 그리고 사람과 인류의 삶이 단지 어둠에서 빛으로, 낮은 단계의 진리에서 높은 단계로, 더 많은 오류로 점철된 진리에서 더욱더 정화된 진리로 지속적으로 이동함이라는 것을 잊어 버린다면, 사람은 분명히 자유롭지 않다.

Man would not be free if he knew no truth at all, and in the same way he would not be free and would not even have any idea of freedom if the whole truth which was to guide him in life had been revealed once for all to him in all its purity without any admixture of error.

만일 사람이 아무런 진리도 모른다면, 그리고 똑 같은 방법으로 인생에서 그들 인도할 전체 진리가, 어떠한 결점도 혼합되지 않고 순수함 그 자체로서, 한꺼번에 모두 그에게 밝혀졌다면, 그는 자유롭지 않을 것이다.

But man is not stationary in regard to truth, but every individual man as he passes through life, and humanity as a whole in the same way, is continually learning to know a greater and greater degree of truth, and growing more and more free from error.

그러나 사람은 진리에 관한한 정체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제각기 개인적인 사람이 그리고 똑 같은 방법으로 전체 인류가, 삶을 통해 지나가면서, 지속적으로 점점 큰 정도의 진리를 알게 되어 가고 있으며, 점점 더 오류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있다.

And therefore men are in a threefold relation to truth. Some truths have been so assimilated by them that they have become the unconscious basis of action, others are only just on the point of being revealed to him, and a third class, though not yet assimilated by him, have been revealed to him with sufficient clearness to force him to decide either to recognize them or to refuse to recognize them.

그리고 그러므로 사람들은 진리에 대해서 세가지로 관련되어 있다. 어떤 진리들은 그들에게 속속들이 흡수되어서 행동의 잠재적인 기초가 되었고, 다른 것들은 오직 막 그에게 밝혀지는 단계에 있으며, 세 번째 종류는, 아직 그에게 흡수되진 않았지만, 충분한 명백함으로 그에게 밝혀져서 그것들을 인식하거나 인식하기를 거부할 것을 강요하고 있다.

These, then, are the truths which man is free to recog­nize or to refuse to recognize.

그렇다면, 이것들이 사람이 자유로이 인식하거나 인식을 거부하는 진리들이다.

The liberty of man does not consist in the power of act­ing independently of the progress of life and the influences arising from it, but in the capacity for recognizing and acknowledging the truth revealed to him, and becoming the free and joyful participator in the eternal and infinite work of God, the life of the world; or on the other hand for refusing to recognize the truth, and so being a miser­able and reluctant slave dragged whither he has no desire to go.

사람의 자유는 삶의 진보나 그로부터 유발되는 영향들로부터 독립되어 행동하는 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밝혀 지는 진리를 인식하고 인정하고, 세상의 생명인, 하나님의 외적이며 무한한 행위에 자유롭고 즐거운 참여자가 되는 것에 있다; 또는 다른 한 편으로, 진리를 인식함을 거부하고 그리하여 그가 원하지 않은 곳으로 끌려가는 불쌍하고 못마땅해 하는 노예가 되는 것이다.

Truth not only points out the way along which human life ought to move, but reveals also the only way along which it can move. And therefore all men must willingly or unwillingly move along the way of truth, some spon­taneously accomplishing the task set them in life, others submitting involuntarily to the law of life. Man's freedom lies in the power of this choice.

진리는 인간의 삶이 따라가며 진행하는 길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그것이 진행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을 밝혀준다. 그리고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은 자의든 타의든 진리의 길을 따라 가야하며, 어떤 사람들은 삶에 정해진 임무들을 자연스레 완수하며, 어떤 사람들은 삶의 법칙에 억지로 굴복하고 있다, 사람의 자유는 이런 선택하는 힘에 놓여 있다.

This freedom within these narrow limits seems so insignificant to men that they do not notice it. Some-­the determinists-consider this amount of freedom so trifling that they do not recognize it at all. Others-the champions of complete free will-keep their eyes fixed on their hypothetical free will and neglect this which seemed to them such a trivial degree of freedom.

이런 협소한 한계들 안에서의 자유는 사람들에게 너무나 사소하게 보여서 그들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결정론자들-은 이정도의 자유를 아주 대수롭지 않게 여겨서 그것을 인식조차 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완전한 자유의지의 옹호자들-은 그들의 가설적인 자유 의지에 그들의 눈들을 고정시키고 이런 사소한 정도의 자유로 느껴지는 이것을 무시한다.

This freedom, confined between the limits of complete ignorance of the truth and a recognition of a part of the truth, seems hardly freedom at all, especially since, whether a man is willing or unwilling to recognize the truth revealed to him, he will be inevitably forced to carry it out in life.

이 자유는, 진리의 완전한 무지와 진리의 부분적인 인식의 사이에 갇혀서, 전혀 자유 같지 않아 보인다, 특히, 그것은 사람이 그에게 밝혀진 진리를 인식하고 싶어하든 아니하든, 삶에서 그것을 필연적으로 수행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A horse harnessed with others to a cart is not free to refrain from moving the cart. If he does not move for­ward the cart will knock him down and go on dragging him with it, whether he will or not. But the horse is free to drag the cart himself or to be dragged with it. And so it is with man.

다른 말들과 함께 마차에 매여진 말은 마차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 자유롭지 않다. 만일 그가 앞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마차는 그를 쳐서 넘기고 끌고 갈 것이다. 그러나 말이 마차를 끌고 가거나 그것에 끌려가는 것은 자유롭다. 그리고 사람의 경우도 그러하다.

Whether this is a great or small degree of freedom in com­parison with the fantastic liberty we should like to have, it is the only freedom that really exists, and in it consists the only happiness attainable by man.

우리가 진정으로 가지고 싶어하는 환상적인 자유에 비하여 이것이 큰 정도의 자유이든 적은 자유이든, 실제로 존재하는 유일한 자유이다, 그리고 그것 안에서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행복이 들어 있다.

And more than that, this freedom is the sole means of accomplishing the divine work of the life of the world.

그리고 거기에 더해서, 이 자유는 세상에서 삶의 신성한 작업을 완수할 유일한 수단이다.

According to Christ's doctrine, the man who sees the significance of life in the domain in which it is not free, in the domain of effects, that is, of acts, has not the true life. According to the Christian doctrine, that man is living in the truth who has transported his life to the domain in which it is free-the domain of causes, that is, the knowl­edge and recognition, the profession and realization in life of revealed truth.

그리스도의 교리에 의하면, 자유롭지 않은 영역에서 삶의 중요성을 깨닫는 사람은, 결과들, , 행위들의 영역에서 진실한 삶을 가지지 못한다. 기독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자유로운 영역-원인들의 영역, , 지식과 인식, 밝혀진 진리의 고백과 삶에 실현-으로 자신의 삶을 옮겨간 그 사람이 진리 안에 살고 있다.

Devoting his life to works of the flesh, a man busies him­self with actions depending on temporary causes outside himself. He himself does nothing really, he merely seems to be doing something. In reality all the acts which seem to be his are the work of a higher power, and he is not the creator of his own life, but the slave of it. Devoting his life to the recognition and fulfillment of the truth revealed to him, he identifies himself with the source of universal life and accomplishes acts not personal, and dependent on con­ditions of space and time, but acts unconditioned by pre­vious causes, acts which constitute the causes of everything else, and have an infinite, unlimited significance.

육신의 업적들에 자신의 삶을 헌신함으로써, 사람은 자신의 외부에 있는 세속적인 원인들에 의존하는 행위들로 분주하다. 그 자신은 실제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그는 단순히 무엇인가를 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현실적으로 그의 것으로 보이는 모든 행위들은 더욱 높은 권능의 작업이며, 그는 자신의 삶의 창조자가 아니라 그것의 노예이다. 자신에게 밝혀진 진리의 인식과 성취에 자신의 삶을 헌신함으로써, 그는 보편적인 삶의 근원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공간과 시간의 조건들에 의존하지만, 기존의 원인들에 제약 받지 않는 행위들, 모든 사물의 원인들을 구성하며 무한하며 무제한의 중요성을 가지는 행위들을 완수한다.

"The kingdom of heaven suffereth violence, and the vio­lent take it by force." (Matt. xi. 12.)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마태복음 11 12)

It is this violent effort to rise above external conditions to the recognition and realization of truth by which the kingdom of heaven is taken, and it is this effort of violence which must and can be made in our times.

외적인 상태들을 초월하여 천국이 구해지는 진리의 인식과 실현으로 오르려는 것이 이런 격렬한 노력이다, 그리고 우리 시대에 반드시 그리고 가능해야 하는 것이 이런 격렬한 노력이다.

Men need only understand this, they need only cease to trouble themselves about the general external conditions in which they are not free, and devote one-hundredth part of the energy they waste on those material things to that in which they are free, to the recognition and realization of the truth which is before them, and to the liberation of them­selves and others from deception and hypocrisy, and, with­out effort or conflict, there would be an end at once of the false organization of life which makes men miserable, and threatens them with worse calamities in the future. And then the kingdom of God would be realized, or at least that first stage of it for which men are ready now by the degree of development of their conscience.

사람들은 오직 이것을 깨달으면 될 뿐이다, 그들은 오직 그들이 자유롭지 않은 일반적 외적인 상태들에 대해 염려함을 중지하면 될 뿐이고, 그들이 자유롭게 여기는 물질적인 것들에 허비하는 힘의 백분의 일이라도 그들 앞에 있는 진리의 인식과 실현에, 그리고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을 기만과 위선으로부터 해방함에 쏟으면 될 뿐이며, 노력이나 갈등이 없다면, 당장에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고, 그들을 미래에 더욱 악한 재앙들로 위협하는 거짓된 삶의 조직에 종지부를 찍을 것이다. 그리고 그리하면 하나님의 왕국은 실현될 것이며, 아니 적어도 그들의 양심의 발전 정도에 의해서 지금 준비된 그 첫 단계라도 실현될 것이다.

Just as a single shock may be sufficient, when a liquid is saturated with some salt, to precipitate it at once in crystals, a slight effort may be perhaps all that is needed now that the truth already revealed to men may gain a mastery over hundreds, thousands, millions of men, that a public opinion consistent with conscience may be established, and through this change of public opinion the whole order of life may be transformed. And it depends upon us to make this effort.

액체가 약간의 소금으로 포화 되어 있을 때, 단 하나의 충격이 당장에 결정들로 만들어 버리듯이, 아마도 약간의 노력이 필요한 모든 것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사람들에게 밝혀진 진리가 수백, 수천,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자리 잡고, 양심과 일치하는 여론이 확립되고, 이런 여론의 변화를 통해서 삶의 전체 질서가 변형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노력을 하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

Let each of us only try to understand and accept the Christian truth which in the most varied forms surrounds us on all sides and forces itself upon us; let us only cease from lying and pretending that we do not see this truth or wish to realize it, at least in what it demands from us above all else; only let us accept and boldly profess the truth to which we are called, and we should find at once that hun­dreds, thousands, millions of men are in the same position as we, that they see the truth as we do, and dread as we do to stand alone in recognizing it, and like us are only wait­ing for others to recognize it also.

오직 우리 각자가 가장 다양한 형태들로 우리의 사방을 둘러 싸고 있으며 우리에게 강요하고 있는 기독교의 진리를 깨닫고 받아들이는 시도를 해보자; 우린 오직 거짓을 중단하고 우리가 이런 진리를 보지 못하며 그것을 깨닫기를 원하지 않는 척하지 말도록 하자, 적어도 무엇보다도 진리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에서 만이라도; 오직 우리가 부름받은 진리를 받아 들이고 대담하게 고백이라도 하자, 그러면, 우리는 당장에 수백, 수천, 수백만의 사람들이 우리와 똑 같은 입장에 있으며, 그들이 우리처럼 진리를 이해하며, 그것을 인식함에 있어서 혼자 서서 우리처럼 두려워 하고 있다고, 우리들처럼 오직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또한 인식하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Only let men cease to be hypocrites, and they would at once see that this cruel social organization, which holds them in bondage, and is represented to them as something stable, necessary, and ordained of God, is already tottering and is only propped up by the falsehood of hypocrisy, with which we, and others like us, support it.

오직 사람들이 위선자들이기를 중지해 보자, 그러면 그들은 당장 이런 잔인한 사회 조직이, 그들을 굴레에 묶어두며, 어떤 안정적이며, 필요하고 하나님이 명령한 것이라고 그들에게 제시되고 있지만, 이미 찢어지고 있으며 오직 위선이라는 거짓에 의해서 지탱되고 있음을 깨달을 것이고, 그것으로 인해서 우리와, 그리고 우리와 같은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지지할 것임을 깨달을 것이다.

But if this is so, if it is true that it depends on us to break down the existing organization of life, have we the right to destroy it, without knowing clearly what we shall set up in its place? What will become of human society when the existing order of things is at an end?

그러나 만일 이것이 그렇다면, 만일 삶의 기존 조직을 무너뜨리는 것이 우리에게 달려 있다는 것이 진실이라면, 그것 대신에 우리가 무엇을 세울 것인지 분명히 모르면서, 우리는 그것을 파괴할 권리가 있는가? 기존 세상 질서가 종말을 고한다면 인류 사회는 어떻게 될 것인가?

"What shall we find the other side of the walls of the world we are abandoning?

“우리가 포기하고 있는 세상의 저 쪽 담 너머에서 우리는 무엇을 발견할 것인가?”

"Fear will come upon us-a void, a vast emptiness, free­dom-how are we to go forward not knowing whither, how face loss, not seeing hope of gain? ... If Columbus had reasoned thus he would never have weighed anchor. It was madness to set off upon the ocean, not knowing the route, on the ocean on which no one had sailed, to sail toward a land whose existence was doubtful. By this madness he discovered a new world. Doubtless if the peoples of the world could simply transfer themselves from one furnished mansion to another and better one-it would make it much easier; but unluckily there is no one to get humanity's new dwelling ready for it. The future is even worse than the ocean-there is nothing there-it will be what men and cir­cumstances make it.

“두려움이 우리를 엄습할 것이다-공허함, 텅 비어 있음, 자유-어디로 가는지 모르고서 우린 어떻게 전진할 것이며, 상급에 대한 희망을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상실을 맞이할 것인가?… 만일 콜럼버스가 이렇게 추론하였다면 그는 결코 출항하지 않았을 것이다. 항로를 모른 채 대양으로, 아무도 항해하지 않은 곳으로, 출발하는 것은, 그 존재가 의심스러운 세계를 향해서 항해한다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이런 광기로서 그는 새로운 세상을 발견하였다. 의심할 여지 없이 만일 세상 사람들이 단순히 가구가 갖추어진 한 저택에서 더 나은 다른 곳으로 옮길 수 있다면-그것은 훨씬 쉬울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인류를 위해서 새로운 주거를 예비하여 주는 사람은 없다. 미래는 심지어 대양보다 더 열악하다-그곳에는 아무것도 없다-그것은 사람들과 상황이 그것을 만드는 것이리라.

"If you are content with the old world, try to preserve it, it is very sick and cannot hold out much longer. But if you cannot bear to live in everlasting dissonance between your beliefs and your life, thinking one thing and doing another, get out of the mediaeval whited sepulchers, and face your fears. I know very well it is not easy.

“만일 당신이 구 세상에 만족하고, 그것을 유지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너무나 병들어서 더 이상 지속할 수 없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이것을 생각하고는 저것을 행하여야 하는, 당신의 믿음과 삶 사이의 영원한 불일치 속에서 살아 갈 수 없다면, 중세 시대의 회 칠한 무덤에서 나오라, 그리고 당신의 두려움들을 직면하라. 나는 그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너무 잘 안다.

"It is not a little thing to cut one's self off from all to which a man has been accustomed from his birth, with which he has grown up to maturity. Men are ready for tremendous sacrifices but not for those which life demands of them. Are they ready to sacrifice modern civilization, their manner of life, their religion, the received conventional morality?

“사람이 태어 나서부터 적응하였으며, 그렇게 자라나서 성인이 된 그 모든 것으로부터 자신을 차단하는 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 사람들은 엄청난 희생들에 준비되어 있지만, 삶이 그들에게 요구하는 것들에는 준비되어 있지 않다. 그들은 현재 문명, 그들의 삶의 양식, 그들의 종교, 일반화된 관습적인 도덕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Are we ready to give up all the results we have attained with such effort, results of which we have been boasting for three centuries; to give up every convenience and charm of our existence, to prefer savage youth to the senile decay of civilization, to pull down the palace raised for us by our ancestors only for the pleasure of having a hand in the founding of a new house, which will doubtless be built long after we are gone?" (Herzen, vol. v. p. 55.)

“우리는 그러한 노력으로 얻은 모든 결과들을, 우리가 삼 세기 동안 자랑해 왔던 결과들을 포기할 수 있는가; 우리 존재의 모든 편리함과 매력을 포기하고, 노쇠한 문명의 쇠퇴보다 야만적인 젊음을 좋아하며, 오직 새 집을 짓는데 동참하는 즐거움을 위해 우리의 선조들에 의해서 세워진 궁전들을 무너뜨리고, 이것은 틀림없이 우리가 가고 나서 오래되어서야 건설될 것임에도 포기할 수 있겠는가? (Herzen, 오권 55페이지)

Thus wrote almost half a century ago the Russian writer, who with prophetic insight saw clearly then, what even the most unreflecting man sees today, the impossibility, that is, of life continuing on its old basis, and the necessity of establishing new forms of life.

이렇게 반세기 전에 러시아의 작가가, 그 당시 예언적인 통찰로서, 오늘날 심지어 가장 지각 없는 사람도 이해하는 것을, , 과거의 기반 위에서 삶을 계속하는 것의 불가능성, 그리고 삶의 새로운 형태들을 확립할 필요성을 기록했다.

It is clear now from the very simplest, most commonplace point of view, that it is madness to remain under the roof of a building which cannot support its weight, and that we must leave it. And indeed it is difficult to imagine a posi­tion more wretched than that of the Christian world to-day, with its nations armed against one another, with its con­stantly increasing taxation to maintain its armies, with the hatred of the working class for the rich ever growing more intense, with the Damocles sword of war forever hanging over the heads of all, ready every instant to fall, certain to fall sooner or later.

무게를 지탱할 수 없는 건물의 지붕 아래 머물러 있는 것은 미친 짓이며, 반드시 그로부터 떠나야 한다는 것은 이제 가장 단순한, 가장 평범한 관점에서 분명하다. 그리고 오늘날의 기독교 세계의 처지보다 더욱 비참한 것을 상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 국가들이 서로를 대적하며, 그들의 군대를 유지하기 위한 세금 부담이 끊임없이 증가하고, 노동자 계급이 더없이 격렬하게 부유한 사람들을 증오하며, 다모클레스의 칼이 모든 사람들의 머리 위에 항상 매달려 있어서, 매 순간마다 떨어질 것 같아서, 조만간 틀림없이 떨어지려는 상황이다.

Hardly could any revolution be more disastrous for the great mass of the population than the present order or rather disorder of our life, with its daily sacrifices to exhausting and unnatural toil, to poverty, drunkenness, and profligacy, with all the horrors of the war that is at hand, which will swallow up in one year more victims than all the revolutions of the century.

엄청난 수의 민중들에게 거의 어떤 혁명도 삶의 현재 질서 또는 혼란 보다도 더한 재앙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삶은 극도로 피곤하고 잔혹한 노동, 빈곤, 술 취함, 그리고, 방종함에 희생되며, 목전에 다다른 전쟁의 모든 공포들이 백 년 동안의 모든 혁명들보다 더 많은 희생자들을 한 해 안에 삼켜버릴 것이다.

What will become of humanity if each of us performs the duty God demands of us through the conscience implanted within us? Will not harm come if, being wholly in the power of a master, I carry out, in the workshop erected and directed by him, the orders he gives me, strange though they may seem to me who do not know the Master's final aims?

우리 각자가 우리 안에 심어진 양심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의무를 수행한다면 인류는 어떻게 될 것인가? 만일, 전적으로 주님의 권능 안에 있으면서, 내가, 그분이 세우고 지휘하는 작업장에서, 주님의 궁극적인 목적들을 모르는 나에게 비록 이상하게 보일지라도, 그가 내게 주는 명령을 수행한다면, 해로움이 있지 않을까?

But it is not even this question "What will happen?" that agitates men when they hesitate to fulfill the Master's will. They are troubled by the question how to live with­out those habitual conditions of life which we call civiliza­tion, culture, art, and science. We feel ourselves all the burdensomeness of life as it is; we see also that this organi­zation of life must inevitably be our ruin, if it continues. At the same time we want the conditions of our life which arise out of this organization-our civilization, culture, art, and science-to remain intact. It is as though a man, liv­ing in an old house and suffering from cold and all sorts of inconvenience in it, knowing, too, that it is on the point of falling to pieces, should consent to its being rebuilt, but only on the condition that he should not be required to leave it: a condition which is equivalent to refusing to have it rebuilt at all.

사람들이 주님의 뜻을 완수하기를 주저할 때 사람들을 동요하게 하는 것은 무엇이 일어날까?” 하는 심지어 이런 질문이 아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문명, 문화, 예술, 그리고 과학이라고 부르는 그런 삶의 습관적인 조건들이 없이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의문으로 염려한다. 우리는 삶의 모든 짐들을 있는 그대로 느낀다; 우리는 또한 이런 삶의 조직이 계속 된다면 필시 우리의 멸망이라는 것을 안다. 동시에 이런 조직-우리의 문명, 문화, 예술, 그리고 과학-으로부터 발생하는 우리의 삶의 상태들이 손대지 않은 지속되기를 바란다. 그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낡은 집에 살면서, 그 안에 있는 감기와 모든 종류의 불편함을 겪으면서도, 또한 그것이 무너져서 박살 날 지경에 있다는 것을 알면서, 그것이 재건축되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지만, 오직 그곳을 떠나지 않는다는 조건을 요구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그 집을 재건축해야 하는 것을 완전히 거부하는 것과 필적하는 조건과 같다.

"But what if I leave the house and give up every con­venience for a time, and the new house is not built, or is built on a different plan so that I do not find in it the com­forts to which I am accustomed?" But seeing that the materials and the builders are here, there is every likelihood that the new house will on the contrary be better built than the old one. And at the same time, there is not only the likelihood but the certainty that the old house will fall down and crush those who remain within it. Whether the old habitual conditions of life are supported, or whether they are abolished and altogether new and better conditions arise; in any case, there is no doubt we shall be forced to leave the old forms of life which have become impossible and fatal, and must go forward to meet the future. "Civilization, art, science, culture, will disappear!" Yes, but all these we know are only various manifesta­tions of truth, and the change that is before us is only to be made for the sake of a closer attainment and realization of truth. How then can the manifestations of truth disap­pear through our realizing it? These manifestations will be different, higher, better, but they will not cease to be. Only what is false in them will be destroyed; all the truth there was in them will only be stronger and more flour­ishing.

“그러나 만일 내가 당분간 집을 떠나고 모든 편리들 포기하더라도, 새로운 집이 지어지지 않거나, 내가 적응하던 안락함을 찾지 못하는 상이한 계획 위에 지어 진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나 재료와 건축가가 여기 있다는 것을 본다면, 새로운 집은 그와 반대로 낡은 집보다 훌륭하게 지어 질 것이라는 모든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동시에, 가능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낡은 집이 무너질 것이고 그 안에 머무르고 있는 사람들 위에 주저 앉을 확실성이 있다. 과거의 습관적인 삶의 상태들이 유지되든, 아니면 그것들이 폐지되고 전적으로 새롭고 훌륭한 상태들이 일어나든; 어떤 경우든, 우리는 불가능하며 치명적이 되어버린 과거의 삶의 형태들을 버려야 할 것이며, 미래에 대처하기 위해서 앞으로 나아 가야 한다. “ 문명, 예술, 과학, 문화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이 모든 것들은 오직 진리의 여러 가지 표현들일 뿐이다, 그리고 우리 앞에 있는 변화는 오직 진리를 더욱 가까이 달성하고 실현하고자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진리의 표현들이 우리가 그것을 깨달음으로 인해서 사라질 수 있을까? 이런 표현들은 달라질 것이며, 더 높이, 더 훌륭할 것이지만, 중지되지는 않을 것이다. 오직 그것들 안에 들어 있는 거짓만이 파괴될 것이다; 그것들 안에 있는 모든 진리들은 더욱 강해지고 번성할 것이다.

Take thought, oh, men, and have faith in the Gospel, in whose teaching is your happiness. If you do not take thought, you will perish just as the men perished, slain by Pilate, or crushed by the tower of Siloam; as millions of men have perished, slayers and slain, executing and exe­cuted, torturers and tortured alike, and as the man foolishly perished, who filled his granaries full and made ready for a long life and died the very night that he planned to begin his life. Take thought and have faith in the Gospel, Christ said eighteen hundred years ago, and he says it with even greater force now that the calamities foretold by him have come to pass, and the senselessness of our life has reached the furthest point of suffering and madness.

오 사람들이여, 생각해 보라, 그리고 복음에 믿음을 가지라, 그 가르침 안에 당신들의 행복이 있다. 당신들이 생각하지 않는다면, 빌라도에게 살해 당하고, 실로암의 탑에 깔린 것처럼 소멸될 것이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소멸되었듯이, 살인자들과 살해당하는 자들, 처형하는 자들과 처형당하는 자들, 고문하는 자들과 고문자들 모두가 소멸되었듯이, 그리고 사람이 어리석게 사라졌듯이, 그는 자신의 곡식창고를 가득 채우고 장수할 준비를 하였다가 그의 삶을 시작하려 계획한 바로 그날 밤에 죽지 않았던가. 생각을 하라 그리고 복음에 믿음을 가지라, 그리스도는 1800 년 전에 말했으며, 그는 이제 심지어 더 큰 힘으로 그것을 말하고 있으며, 그가 예언하였던 재앙들이 일어나고 있고, 우리의 삶의 무의미함이 고통과 광기의 극한에 도달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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