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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Non-Resistance

무저항에 관하여


TOLSTOY'S LETTER TO ERNEST HOWARD CROSBY*

 

    January 12, 1896 

    Translated by Professor Leo Wiener (1905)

 

 

 
    My Dear Crosby: -- I am very glad to hear of your activity and that it is beginning to attract attention.  Fifty years ago Garrison's proclamation of non-resistance only cooled people toward him, and the whole fifty years' activity of Ballou in this direction was met with stubborn silence.  I read with great pleasure in *Peace* the beautiful ideas of the American authors in regard to non-resistance.  I make an exception only in the case of Mr. Bemis's old, unfounded opinion, which calumniates Christ in assuming that Christ's expulsion of the cattle from the temple means that he struck the men with a whip, and commanded his disciples to do likewise.

친애하는 크로스비님 -- 나는 당신의 활동과 그것이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는 것을 듣고서 정말 기뻤습니다. 오십 년 전 개리슨의 무저항 선언은 오직 사람들이 그를 향해서 냉담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방향에서 발루의 전체 오십 년 간의 활동도 완고한 침묵에 봉착했습니다. 나는 평화에서 커다란 즐거움으로 무저항에 관련한 미국 작가들의 훌륭한 사상들을 읽었습니다. 나는 오직 Mr. Bemis의 케케묵고 근거 없는 의견의 경우에만 오직 예외를 두었으며, 그 내용은 그리스도가 성전으로부터 가축을 몰아낸 것은 그가 사람들을 회초리로 때린 것을 의미하며, 그의 제자들에게 똑같이 행하라고 명령하였다고 주장하면서 그리스도를 중상하는 것이었습니다.

     The ideas expressed by these writers, especially by H. Newton and G. Herron, are beautiful, but it is to be regretted that they do not answer the question which Christ put before men, but answer the question which the so-called orthodox teachers of the churches, the chief and most dangerous enemies of Christianity, have put in its place.

이들 작가들에 의하여, 특히 H. Newton 및 G. Herron에 의하여, 표명된 사상들은 훌륭합니다, 그러나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그것들은 그리스도가 사람들 앞에 제시한 문제들에 대답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최고의 그리고 가장 위험한 적들인, 소위 교회의 정통파 교사들이, 그 대신에 제시한 문제들에 답하는 것입니다. 

     Mr. Higginson says that the law of non-resistance is not admissible as a general rule.  H. Newton says that the practical results of the application of Christ's teaching will depend on the degree of faith which men will have in this teaching.  Mr. C. Martyn assumes that the stage at which we are is not yet suited for the application of the teaching about non-resistance.  G. Herron says that in order to fulfil the law of non-resistance, it is necessary to learn to apply it to life.  Mrs. Livermore says the same, thinking that the fulfilment of the law of non-resistance is possible only in the future.

Mr. Higginson은 무저항의 법이 일반적 규칙으로서 허용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H. Newton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적용의 실제적 결과들은 사람들이 그의 가르침 안에서 가지게 되는 신앙의 정도에 달려 있다고 말합니다. Mr. C. Martyn은 우리가 처해있는 단계는 아직 무저항에 관한 가르침의 적용에 적합하지 않다고 가정합니다. G. Herron는 무저항의 법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삶에 적용함을 배우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Mrs. Livermore는 똑같이 말하고 있으며, 무저항의 법의 성취는 오직 미래에나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All these opinions treat only the question as to what would happen to people if all were put to the necessity of fulfilling the law of non-resistance; but, in the first place, it is quite impossible to compel all men to accept the law of non-resistance, and, in the second, if this were possible, it would be a most glaring negation of the very principle which is being established.  To compel all men not to practise violence against others!  Who is going to compel men?

이 모든 의견들은 만일 모든 사람들이 무저항의 법을 완수할 필요에 처해진다면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생길 것인가에 대한 질문 만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첫 번째로, 모든 사람들이 무저항의 법을 받아 들이도록 강제하는 것은 심히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만일 이것이 가능하다면, 규정되어지고 있는 바로 그 원리에 대한 명약관화한 부정일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폭력을 행사하지 말 것을 강제하는 것! 누가 사람들을 강제할 것입니까?  

     In the third place, and above all else, the question, as put by Christ, does not consist in this, whether non-resistance may become a universal law for all humanity, but what each man must do in order to fulfil his destiny, to save his soul, and do God's work, which reduces itself to the same.

세 번째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에 의해서 제시되었듯이, 문제는 이것에, 즉 무저항이 모든 인류의 보편적인 법이 될 것인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각기 사람이 그의 운명을 달성하기 위하여, 자신의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일을 행하기 위하여 무엇을 행해야만 하는가에 있으며, 그것은 똑같은 것으로 귀결되어 버리고 맙니다.

     The Christian teaching does not prescribe any laws for all men; it does not say, "follow such and such rules under fear of punishment, and you will all be happy," but explains to each separate man his position in the world and shows him what for him personally results from this position.  The Christian teaching says to each individual man that his life, if he recognizes his life to be his, and its aim, the worldly good of his personality or of the personalities of other men, can have no rational meaning, because this good, posited as the end of life, can never be attained, because, in the first place, all beings strive after the goods of the worldly life, and these goods are always attained by one set of beings to the detriment of others, so that every separate man cannot receive the desired good, but, in all probability, must even endure many unnecessary sufferings in his struggle for these unattained goods; in the second place, because if a man even attains the worldly goods, these, the more of them he attains, satisfy him less and less, and he wishes for more and more new ones; in the third place, mainly because the longer a man lives, the more inevitably do old age , diseases, and finally death, which destroys the possibility of any worldly good, come to him.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모든 사람들에게 어떤 법칙들을 명령하지는 않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고 그런 규칙들을 처벌의 두려움에도 이행하라, 그러면 너희는 모두 행복할 것이다," 그러나, 각자 개별적인 사람에게 세상에서 그의 위치를 설명해주고 그에게 있어서 개인적으로 그의 위치로부터 무엇이 초래되는지 보여줍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각자 개벽적인 사람에게 그의 삶, 만일 그가 그의 삶이 자기 것이라고 인식한다면, 그리고 그 목적, 자기 자신의 또는 다른 사람들 자신들의  세속적 이익은 아무런 합리적 의미를 가질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첫째로, 모든 존재들은 세속적 삶의 이익들을 추구하며; 그리고 이들 이익들은 언제나 한 무리의 존재들이 다른 무리에게 해를 끼치면서 얻어 지기 때문이며, 결국 제각기 별개의 사람들은 바라는 이익을 받을 수 없으며, 그러나, 모든 가능성에서, 심지어 이와 같은 얻지 못한 이익들을 갖기 위한 투쟁에서 많은 불필요한 고통들을 견뎌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그 이유는 만일 한 사람이 세속적 이익들을 성취한다고 하면, 그가 성취하면 할 수록, 이것들은 그에게 점점 적은 만족을 주게 되며, 그는 더욱 새로운 것들을 바라게 됩니다; 셋째로, 주된 이유로서 사람은 오래 살면 살수록, 더 필연적으로 노령, 질병들, 그리고 마침내는 모든 세속적 이익의 가능성을 파괴하는 죽음이, 그에게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Thus, if a man considers his life to be his, and its end to be the worldly good, for himself or for other men, this life can have for him no rational meaning.  Life receives a rational meaning only when a man understands that the recognition of his life as his own, and the good of personality, of his own or of that of others, as its end, is an error, and that the human life does not belong to him, who has received this life from some one, but to Him who produced this life, and so its end must not consist in the attainment of his own good or of the good of others, but only in the fulfilment of the will of Him who produced it.  Only with such a comprehension of life does it receive a rational meaning, and its end, which consists in the fulfilment of God's will, become attainable, and, above all, only with such a comprehension does man's activity become clearly defined, and he no longer is subject to despair and suffering, which were inevitable with his former comprehension.

그리하여, 만일 한 사람이 그의 삶이 자기 것이라고 여긴다면, 그리고 그 목적이 자신을 위한 또는 다른 사람들을 위한 세속적 이익이라면, 이와 같은 삶은 그에게 있어서 아무런 합리적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삶은 오직 한 사람이 그의 삶이 자기 자신의 것으로, 그리고 자기 자신의 또는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그 목적으로, 인식함은 오류이며, 그리고 인간의 삶이 그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 그는 이와 같은 삶을 누구에게로부터 받았기에, 이런 삶을 창조한 그분에게 속하며, 그리고 그러므로 그 목적은 반드시 자기 자신의 이익 또는 다른 사람들의 이익의 성취에 있어서는 안되며, 그러나 오직 그것을 창조하신 그분의 의지의 성취에 있음을, 깨달을 때에 합리적인 의미를 가집니다. 오직 삶에 대한 그러한 깨달음으로써 그것은 합리적인 의미를 가지며, 그 목적이, 하나님의 의지의 성취에 있는 것으로, 성취될 수 있게 되며, 무엇보다도, 오직 그러한 깨달음으로 사람의 행위가 명백하게 정의될 수 있게 되며, 그는 더 이상, 그의 이전의 깨달음으로서는 피할 수 없었던, 절망과 고통에 종속되지 않습니다. 

     "The world and I in it," such a man says to himself, "exist by the will of God.  I cannot know the whole world and my relation to it, but I can know what is wanted of me by God, who sent men into this world, endless in time and space, and therefore inaccessible to my understanding, because this is revealed to me in the tradition, that is, in the aggregate reason of the best people in the world, who lived before me, and in my reason, and in my heart, that is, in the striving of my whole being.

"세상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나는", 그러한 사람은 자신에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의지에 의해 존재한다. 나는 전체 세상 그리고 그것에 대한 나의 관계를 알 수 없으나, 나는, 나를 이 세상에 보내신, 시간과 공간에서 무한하신, 그러므로 나의 깨달음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하나님에 의해 나에게 요구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전승에서, 즉, 나 이전에 살았던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들의 집합된 이성에서, 그리고 나의 이성 안에서, 그리고 나의 마음에서, 즉, 나의 전체 존재의 몸부림 안에서 내게 드러난 것입니다.

     "In the tradition, the aggregate of the wisdom of all the best men, who lived before me, I am told that I must act toward others as I wish that others would act toward me; my reason tells me that the greatest good of men is possible only when all men will act likewise.

"전승, 나의 앞에 살았던, 모든 가장 훌륭한 사람들의 지혜 안에서, 나는 반드시 다른 사람들이 나를 향해 행할 것을 내가 바라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행할 것을 명령 받습니다; 나의 이성은 나에게, 사람들에게 가장 큰 선은 오직 모든 사람들이 이와 같이 행동할 때에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My heart is at peace and joyful only when I abandon myself to the feeling of love for men, which demands the same.  And then I can not only know what I must do, but also the cause for which my activity is necessary and defined.

"나의 마음은 오직 내가 사람들을 위한 사랑의 느낌에 나 자신을 포기할 때에 평화로우며 즐겁습니다, 그리고 그 느낌은 똑같은 것을 요구합니다. 그렇다면 나는 내가 반드시 행해야 할 것 뿐만 아니라, 나의 행위가 필요하며 정의되는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I cannot grasp the whole divine work, for which the world exists and lives, but the divine work which is being accomplished in this world and in which I am taking part with my life is accessible to me.  This work is the destruction of the discord and of the struggle among men and other beings, and the establishment among men of the greatest union, concord, and love; this work is the realization of what the Jewish prophets promised, saying that the time will come when all men shall be taught the truth, when the spears shall be forged into pruning-hooks, and the scythes and swords into ploughshares, and when the lion shall lie with the lamb."

"나는 전체적인 하나님의 사업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세상은 존재하며 살아가고 있으나, 이 세상에서 성취되는 그리고 나의 삶과 함께 하는 하나님의 사업은 내가 접할 수 있습니다. 이 사업은 사람들 및 다른 존재들의 사이의 불화와 투쟁의 파기와,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큰 연합, 화합 및 사랑의 확립입니다; 이 사업은 유대교의 선지자들이 약속하였던, 모든 사람들이 진리를 배우고, 창들을 쳐서 낫들을 만들고, 싸움 낫과 칼들을 쳐서 쟁기를 만들며, 사자가 양과 함께 누워 있는 때가 올 것이라고 말한 것의 실현입니다."

     Thus, the man of the Christian comprehension of life not only knows how he must act in life, but also what he must do.

그리하여, 삶에 대한 그리스도적 깨달음을 가진 사람은 그가 삶 안에서 어떻게 행할 것인가 뿐만 아니라, 그가 무엇을 행할 것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He must do what contributes to the establishment of the kingdom of God in the world.  To do this, a man must fulfil the inner demands of God's will, that is, he must act amicably toward others, as he would like others to do to him.  Thus the inner demands of a man's soul coincide with that external end of life which is placed before him.

사람은 반드시 세상에서 하나님의 왕국의 설립에 기여하는 것을 행해야 합니다. 이것을 하기 위해서,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의 의지의 내적인 요구들을 완수해야 합니다, 즉, 그는 반드시, 그가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행할 것을 원하듯이, 다른 사람들을 향하여 우호적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사람의 영혼의 내적인 요구들은 그의 앞에 놓여 있는 그와 같은 삶의 외적인 목적에 일치합니다.

     And here though we have an indication which is so clear to a man of the Christian comprehension, and incontestable from two sides, as to what the meaning and end of human life consists in, and how a man must act, and what he must do, and what not, there appear certain people, who call themselves Christians, who decide that in such and such cases a man must depart from God's law and the common cause of life, which are given to him, and must act contrary to the law and the common cause of life, because, according to their ratiocination, the consequences of the acts committed according to God's law may be profitless and disadvantageous for men.

그리고 여기서 비록 우리가, 인간의 삶의 의미와 목적은 무엇에 있는가, 그리고 사람은 어떻게 행동해야만 하는가, 그리고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그리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에 대하여 양측으로부터 논란의 여지가 없는 그리스도적 깨달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너무나 명백한 예시를 가지고 있지만, 그렇고 그런 경우들에는 사람이 반드시 하나님의 법과 자기에게 주어진 삶의 공통의 원인에서 떠나야 하며, 반드시 법과 삶의 공통의 원인에 대치되어 행동하여야 한다고 단정하는, 자칭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부르는, 어떤 사람들이 있어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추론에 따르면, 하나님의 법에 따라서 행해진 행위들의 결과들은 사람들을 위해서 소득이 없으며 불리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Man, according to the Christian teaching, is God's workman.  The workman does not know his master's whole business, but the nearest aim to be attained by his work is revealed to him, and he is given definite indications as to what he should do; especially definite are the indications as to what he must not do, in order that he may not work against the aim for the attainment of which he was sent to work.  In everything else he is given complete liberty.  And so for a man who has grasped the Christian conception of life the meaning of his life is clear and rational, and he cannot have a moment of wavering as to how he should act in life and what he ought to do, in order to fulfil the destiny of his life.

사람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의하면, 하나님의 일꾼입니다. 일꾼은 그의 주인의 전체 사업을 모릅니다, 그러나 그의 일로서 달성되는 가장 근접한 목적이 그에게 드러나며, 그에게는 그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표시들이 주어집니다; 특별히 명확한 것은, 그가 그에게 일하도록 맡겨진 목적의 달성에 반대로 일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그가 무엇을 하지 않아야 하는가에 대한 예시들입니다. 그 외의 모든 것에서 그에게는 완전한 자유가 주어집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적 개념의 삶을 이해한 사람에게 있어서는 그의 삶의 의미는 명백하고 합리적입니다, 그리고 그의 삶의 숙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그에게는 그가 삶에서 어떻게 행동해야만 하는가에 그리고 그가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에 대해서 한 순간의 흔들림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According to the law given him in the tradition, in his reason, and in his heart, a man must always act toward another as he wishes to have done to him:  he must contribute to the establishment of love and union among men; but according to the decision of these far-sighted people, a man must, while the fulfilment of the law, according to their opinion, is still premature, do violence, deprive of liberty, kill people, and with this contribute, not to union of love, but to the irritation and enragement of people.  It is as though a mason, who is put to do certain definite work, who knows that he is taking part with others in the building of a house, and who has a clear and indubitable command from the master himself that is to lay a wall, should receive the command from other masons like him, who, like him, do not know the general plan of the structure and what is useful for the common work, to stop laying the wall, and to undo the work of the others.

전승 안에서, 그의 이성 안에서, 그리고 그의 마음 안에서 을 통하여 그에게 주어진 법에 따르면, 사람은 반드시 언제나 그에게 행해졌으면 하고 바라는 것을 다른 사람을 향해서도 행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반드시 사람들 사이에서 사랑과 연합의 확립에 기여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들 앞을 내다보는 사람들의 결정에 따르면, 법의 성취는 그들의 의견에 따르면 아직 이른 반면에, 사람은 반드시 폭력을 행하고, 자유를 박탈하며, 사람들을 살해하고, 그리고 이런 기여로서, 사랑의 연합으로가 아니라, 사람들의 초조함과 분노로 향해져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어떤 석공이, 어떤 명확한 일을 부여 받고, 집의 건축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참여하고 있음을 알고 있으며, 바로 주인으로부터 명백하며 의혹의 여지가 없는, 말하자면 벽을 쌓으라는 명령을 받았음에도, 그와 같이 구조물에 대한 전반적인 계획을 모르며 공동의 작업을 위하여 무엇이 유용한지도 모르는,그와 같은 다른 석공들로부터 벽을 쌓기를 중단하라는 명령을 받고, 다른 사람들의 작업을 망치는 것과 같습니다.

     Wonderful delusion!  The being that breathes today and disappears tomorrow, that has one definite, incontestable law given to him, as to how he is to pass his short term of life, imagines that he knows what is necessary and useful and appropriate for all men, for the whole world, for that world which moves without cessation, and goes on developing, and in the name of this usefulness, which is differently understood by each of them, he prescribes to himself and to others for a time to depart from the unquestionable law, which is given to him and to all men, and not to act toward all men as he wants others to act toward him, not to bring love into the world, but to practise violence, to deprive of freedom, to punish, to kill, to introduce malice into the world, when it is found that this is necessary.  And he enjoins us to do so knowing that the most terrible cruelties, tortures, murders of men, from the Inquisitions and punishments and terrors of all the revolutions to the present bestialities of the anarchists and the massacres of them, have all proceeded from this, that men suppose that they know what people and the world need; knowing that at any given moment there are always two opposite parties, each of which asserts that it is necessary to use violence against the opposite party, -- the men of state against the anarchists, the anarchists against the men of state; the English against the Americans, the Americans against the English; the English against the Germans; and so forth, in all possible combinations and permutations.

놀라운 기만입니다! 오늘 숨쉬다가 내일이면 사라지는, 짧은 삶의 기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에 대해, 명확하며 그에게 주어진 논박할 수 없는 법을 가지고 있는 존재가, 모든 사람들에게, 전체 세상을 위하여, 쉼 없이 움직이며 계속해서 발전하는 그와 같은 세상을 위하여, 필요하며,유익하고 적절한 것을 알고 있다고 상상하며, 이러한 유익함이라는 이름으로, 그것이 그들 각자에게 달리 이해되고 있음에도, 그는 자기 자신에게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의문의 여지가 없는, 그와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법으로부터, 당분간 떨어져 있으라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행하기를 그가 원하는 대로 모든 사람들을 향하여 행하지 말 것을, 세상에 사랑을 가져다 주지 말 것을, 그러나 폭력을 행사하고, 자유를 박탈하며, 처벌하고, 살해하고, 세상에 해악을 가져다 줄 것을, 이와 같은 일이 필요하다고 여겨질 때면,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우리에게, 가장 무서운 잔학 행위들, 고문들, 사람들의 살인들이, 종교재판 그리고 처형들 그리고 모든 혁명들의 공포들로부터, 현재의 무정부주의자들 그리고 그들에 대한 대학살과 같은 현재의 잔학 행위들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이것으로부터 진행되었으며, 사람들은 그들이 사람들과 세계가 필요로 하는 것을 알고 있다고 상상하고 있음을 알고 있음에도; 어떤 주어진 순간에도 언제나 대치하는 쌍방이 있으며, 그들 각자는 대치하는 상대방에게 - 국가주의자들이 무정부주의자과 대치하여, 무정부주의자들이 국가주의자들에 대치하여; 영국이 미국과 대치하여, 미국이 영국과 대치하여; 영국이 독일에 대치하여, 등등, 모든 가능한 조합과 순열 안에서 - 폭력을 사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처럼 행할 것을 명령합니다.

     Not only does a man of the Christian concept of life see clearly by reflection that there is no ground whatever for his departure from the law of his life, as clearly indicated to him by God, in order to follow the accidental, frail, frequently contradictory demands of men; but if he has been living the Christian life for some time, and has developed in himself the Christian moral sensitiveness, he can positively not act as people demand that he shall, not only as the result of reflection, but also of feeling.

그리스도적 개념의 삶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에 의해서 그에게 명백히 지시된 대로의 자신의 삶의 법을으로부터, 우발적이며, 나약하며, 모순적인 사람들의 요구들을 따라가기 위하여 이탈함이 도대체 아무런 근거가 없음을 심사숙고에 의해서 명백히 이해할 뿐만 아니라; 만일, 얼마 동안 그리스도적 삶을 살고 있었으며, 자기 자신 안에 그리스도적 도덕의 민감성을 발전시켰다면, 그는 단연코, 심사숙고의 결과로서 뿐만 아니라 느낌으로도, 사람들이 그에게 행할 것을 요구하는 대로 행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As it is for many men of our world impossible to subject a child to torture and to kill it, though such a torture may save a hundred other people, so a whole series of acts becomes impossible for a man who has developed the Christian sensitiveness of his heart in himself.  A Christian, for example, who is compelled to take part in court proceedings, where a man may be sentenced to capital punishment, to take part in matters of forcible seizure of other people's property, in discussions about the declaration of war, or in preparations for the same, to say nothing of war itself, finds himself in the same position in which a good man would be, if he were compelled to torture or kill a child.  It is not that he decides by reflection what he ought not to do, but that he cannot do what is demanded of him, because for a man there exists the moral impossibility, just as there is a physical impossibility, of committing certain acts.  Just as it is impossible for a man to lift up a mountain, as it is impossible for a good man to kill a child, so it is impossible for a man who lives a Christian life to take part in violence.  Of what significance for such a man can be the reflections that for some imaginary good he must do what has become morally impossible for him?

우리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자녀를 고문하고 그를 살해할 수 없는 것처럼, 비록 그런 고문이 백 명의 다른 사람들을 구할지라도, 자기 자신 안에 자신의 마음에 대해 그리스도적인 민감성을 발전시킨 사람에게 있어서도 행위들에 대한 전적인 연속들도 불가능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예를 들면, 그가 어떤 사람이 사형에 처해지도록 하는 소송절차에 참여하도록, 다른 사람들의 재산에 대한 강압적인 압수에 참여하도록, 전쟁의 선포에 관한 토론에, 또는, 전쟁 그 자체는 말할 것도 없이, 전쟁의 준비에 관한 토론에 참여하도록 강요 받으면, 그가 아이를 고문하고 살해하도록 강요 당할 때의 한 선량한 사람의 입장에서 그러한 것처럼 자기 자신도 똑같이 처신할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당연히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심사숙고에 의해서 결정함이 아니라, 사람에게 있어서는, 특정한 행위들에 대하여, 신체적 불능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도덕적 불능도 존재하기 때문에, 그는 자신에게 요구되는 것을 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산을 들어 올리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선량한 사람이 아이를 살해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그리스도적 삶을 사는 사람이 폭력에 참여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무슨 중요성 때문에 그와 같은 사람에게 있어서 어떤 상상의 이익을 위하여 그에게 도덕적으로 불가능하게 되어버린 것을 반드시 그가 행해야만 한다는 깊은 생각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How, then, is a man to act when he sees the obvious harm of following the law of love and the law of non-resistance, which results from it?  How is a man to act -- this example is always adduced -- when a robber in his sight kills or injures a child, and when the child cannot be saved otherwise than by killing the robber?

그렇다면, 사람은 사랑의 법 그리고 무저항의 법을 따름에 대한, 그리고 그로부터 초래되는, 명백한 해로움을 볼 때에, 어떻게 행동해야 합니까? 이것은 언제나 제기됩니다 - 그가 볼 때에 어떤 강도가 아이를 살해하거나 다치게 할 때에, 그리고 강도를 살해하지 않고서는 아이가 구조될 수 없을 때에, 사람은 어떻게 행동하여야 합니까? 

     It is generally assumed that, when they adduce such an example, there can be no other answer to the question than that the robber ought to be killed, in order that the child be saved.  But this answer is given so emphatically and so quickly only because we are not only in the habit of acting in this manner in the case of the defence of a child, but also in the case of the expansion of the borders of a neighbouring state to the detriment of our own, or in the case of the transportation of lace across the border, or even in the case of the defence of the fruits of our garden against depredations by passers-by.

일반적으로, 그들이 그와 같은 예를 제기할 때에, 아이가 구조되려면 강도가 살해되어야 한다는 것 말고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있을 수 없다고, 가정됩니다. 그러나 이 대답은 너무나 단호하게 그리고 너무나 신속하게 주어집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이를 방어하는 경우에 뿐만 아니라, 이웃 국가가 우리 자신의 국경들을 침범을 통한 확장의 경우에, 또는 황금줄을 국경 너머로 수송하는 경우에, 또는 심지어 행인들의 약탈에 대항하여 우리 정원의 과일들을 방어하는 경우에도  이와 같은 방법으로 행동하는 습관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It is assumed that it is necessary to kill the robber in order to save the child, but we need only stop and think on what ground a man should act thus, be he a Christian or a non-Christian, to convince ourselves that such an act can have no rational foundations, and is considered necessary only because two thousand years ago such a mode of action was considered just and people were in the habit of acting thus.  Why should a non-Christian, who does not recognize God and the meaning of life in the fulfilment of His will, kill the robber, in defending the child?  To say nothing of this, that in killing the robber he is certainly killing, but does not know for certain until the very last moment whether the robber will kill the child or not, to say nothing of this irregularity:  who has decided that the life of the child is more necessary and better than the life of the robber?

아이를 구하기 위해 강도를 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가정되지만, 우리는 사람이 어떤 근거로 그와 같이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그가 그리스도인이든 그리스도인이 아니든, 오로지 멈추어 생각할 필요가 있으며, 결국 그런 행위는 아무런 합리적 근거들을 가질 수 없음을 확신하게 되며, 오직 이 천년 전에 그러한 행동 양상이 정의롭다고 여겨졌으며 사람들이 그와 같이 행하는 습관이 들었기 때문에 필요하다고 여겨진다고 가정됩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의지의 성취에 따른 삶의 의미를 인정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은, 왜 아이를 방어함에서 강도를 살해해야만 합니까? 이것을 말할 필요도 없이, 강도를 살해함에서 그는 분명히 살해하고 있지만, 바로 가장 마지막 순간까지 강도가 아이를 죽일 것인지 아닌지를 확실히 알지 못합니다, 이와 같은 불규칙성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누가 아이의 목숨이 강도의 목숨보다도 더욱 필요하며 중요하다고 결정하였는가?

     If a non-Christian does not recognize God, and does not consider the meaning of life to consist in the fulfilment of God's will, it is only calculation, that is, the consideration as to what is more profitable for him and for all men, the continuation of the robber's life or that of the child, which guides the choice of his acts.  But to decide this, he must know what will become of the child which he saves, and what would become of the robber if he did not kill him.  But that he cannot know.  And so, if he is a non- Christian, he has not rational foundation for saving the child through the death of the robber.

만일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며, 삶의 의미가 하나님의 뜻의 성취에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면, 그것은 오직 심사숙고, 즉, 자신을 위하여 그리고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강도의 목숨의 유지 또는 아이의 목숨의 유지 중에서 무엇이 더 이익인가에 대한 고려일 뿐이며, 그것은 그의 행위들의 선택을 인도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결정하기 위하여, 그는 그가 구한 그 아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지, 그리고 그가 강도를 죽이지 않았다면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만일 그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면, 그는 강도의 죽음을 통하여 아이를 구함에 대한 합리적인 근거를 가지지 못합니다.

     But if the man is a Christian, and so recognizes God and sees the meaning of life in the fulfilment of His will, no matter what terrible robber may attack any innocent and beautiful child, he has still less cause to depart from the law given him by God and to do to the robber what the robber wants to do to the child; he may implore the robber, may place his body between the robber and his victim, but there is one thing he cannot do, -- he cannot consciously depart from the law of God, the fulfilment of which forms the meaning of his life.  It is very likely that, as the result of his bad bringing up and of his animality, a man, being a pagan or a Christian, will kill the robber, not only in the defence of the child, but also in his own defence or in the defence of his purse, but that will by no means signify that it is right to do so, that it is right to accustom ourselves and others to think that that ought to be done.

그러나 만일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며, 그래서 하나님을 인정하며 그분의 의지의 성취에서 삶의 의미를 깨닫는다면, 아무리 무서운 강도가 어느 순진하고 아름다운 아이를 공격할지라도, 그는 여전히 하나님이 그에게 준 법으로부터 이탈하며 강도가 그 아이에게 행하고자 했던 것을 강도에게 행할 이유가 거의 없습니다; 그는 아마 그 강도에게 애원할 것이며, 자신의 몸을 강도와 그의 희생자 사이에 밀어 넣겠지만, 그가 행할 수 없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 그는 의식적으로 하나님의 법으로부터 이탈할 수 없으며, 그것의 성취가 그의 삶의 의미를 형성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악하게 양육되었거나 그의 동물적 본성의 결과로서, 어떤 사람이, 이교도이든 그리스도인이든, 아이를 방어함에서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하여 또는 그의 지갑을 방어함에서, 강도를 죽일 것이나, 그것이 결코 그렇게 행함이 옳으며, 그런 행위가 당연히 행해져야 한다고 생각하도록 우리 자신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적응하는 것이 옳음을 나타내는 것은 아닙니다.

     This will only mean that, in spite of the external education and Christianity, the habits of the stone age are still strong in man, that he is capable of committing acts which have long ago been disavowed by his consciousness.  A robber in my sight is about to kill a child and I can save it by killing the robber; consequently it is necessary under certain conditions to resist evil with violence.

이것은 오직, 외적인 교육 및 그리스도교에도 불구하고, 석기 시대의 습성들이 아직도 사람 안에 강하게 남아 있으며, 그의 의식에 의해서 오래 전에 부정된 행위들을 저지를 능력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내가 보기에 어떤 강도가 아이를 살해하려고 하며 나는 그 강도를 살해함으로써 그를 구할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특정한 상황들에서는 악을 폭력으로 저항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A man is in danger of his life and can be saved only through my lie; consequently it is necessary in certain cases to lie.  A man is starving, and I cannot save him otherwise than by stealing; consequently it is necessary in certain cases to steal.

어떤 사람이 그의 목숨이 위험에 처해 있으며 오직 나의 거짓말로서 구해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경우들에서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어떤 사람이 굶어 죽어가고 있으며, 나는 도둑질하는 것 외에는 그를 구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어떤 경우들에서는 도둑질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I lately read a story by Coppee, in which an orderly kills his officer, who has his life insured, and thus saves his honour and the life of his family.  Consequently in certain cases it is right to kill.

나는 최근에 Coppee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그 곳에서 어떤 위생병이 그의 상관을 살해하며, 그는 자신의 생명을 보험에 들었으며, 그리하여 그의 명예와 그의 가족의 생명을 살립니다. 따라서 어떤 경우들에서는 살해하는 것이 옳은 일입니다.

     Such imaginary cases and the conclusions drawn from them prove only this, that there are men who know that it is not right to steal, to lie, to kill, but who are so loath to stop doing this that they use all the efforts of their mind in order to justify their acts.  There does not exist a moral rule for which it would be impossible to invent a situation when it would be hard to decide which is more moral, the departure from the rule or its fulfilment.  The same is true of the question of non-resistance to evil:  men know that it is bad, but they are so anxious to live by violence, that they use all the efforts of their mind, not for the elucidation of all the evil which is produced by man's recognition of the right to do violence to others, but for the defence of this right.  But such invented cases in no way prove that the rules about not lying, stealing, killing are incorrect.

이와 같은 상상에 의한 경우들과 그것들로부터 도출한 결론들은 오직 이것을 증명합니다, 즉, 도둑질, 거짓말, 살인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것을 행함을 중지하기를 너무나 꺼려하여서 그들은 그들의 행위들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그들의 마음으로 모든 노력들을 다하는 것입니다. 규칙으로부터의 이탈 또는 그것의 성취 중에서, 어느 것이 더 도덕적인지 결정하기 어려울 때에, 한 가지 상황을 조작해 내는 것이 불가능한 도덕적 규칙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악에 대한 무저항의 문제에 대해서도 똑같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이 나쁘다는 것을 알고 있으나, 그들은 너무나 폭력에 의지해 살고 싶어하므로, 다른 사람들에게 폭력을 행사할 권리를 사람이 인정함으로써 생산되는 모든 악을 설명함이 아니라, 이와 같은 권리의 방어를 위해서, 마음으로 모든 노력을 경주합니다. 

     "*Fais ce que doit, advienne que pourra*, -- do what is right, and let come what may," -- is an expression of profound wisdom.  Each of us knows unquestionably what he ought to do, but none of us knows or can know what will happen.  Thus we are brought to the same, not only by this, that we must do what is right, but also by this, that we know what is right, and do not know at all what will come and result from our acts.

"Fais ce que doit, advienne que pourra, -- 옳을 것을 행하라,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냥 두라," -- 는 심오한 지혜의 표현입니다. 우리들 각자는 의문의 여지 없이 그가 당연히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지만,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우리들 중 아무도 모르며 알 수도 없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반드시 옳은 것을 행해야 한다는 이것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무엇이 옳은 것인지 우리가 알고 있으며, 우리의 행위들로부터 무엇이 나와서 초래될 것인지 전혀 모른다는 이것에 의하여, 우리는 똑같은 일에 마주하게 됩니다. 

     The Christian teaching is a teaching as to what a man must do for the fulfilment of the will of Him who sent him into the world.  But the reflections as to what consequences we assume to result from such or such acts of men not only have nothing in common with Christianity, but are that very delusion which destroys Christianity.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자신을 이 세상에 보내신 그분의 의지의 성취를 위하여 사람이 반드시 행해야 할 것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그렇고 그런 행위들로부터 어떤 결과들이 초래된다고 우리가 가정하는가에 대한 심사숙고들은 그리스도교와 아무런 공통점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그리스도교를 파괴하는 바로 기만 그 자체입니다.

     No one has yet seen the imaginary robber with the imaginary child, and all the horrors, which fill history and contemporary events, have been produced only because men imagine that they can know the consequences of the possible acts.

어느 누구도 아직, 역사와 현대의 사건들을 채우는, 상상의 강도를 상상의 아이, 그리고 모든 공포들을 함께 본적이 없으며, 그것들은 오직 사람들이 그들이 가능한 사건들의 결과들을 알 수 있다고 상상하기 때문입니다.

     How is this?  Men used to live a beastly life, violating and killing all those whom it was advantageous for them to violate and kill, and even eating one another, thinking that that was right.  Then there came a time, when, thousands of years ago, even in the time of Moses, there appeared the consciousness in men that it was bad to violate and kill one another.  But there were some men for whom violence was advantageous, and they did not recognize the fact, and assured themselves and others that it was not always bad to violate and kill men, but that there were cases when this was necessary, useful, and even good.  And acts of violence and murder, though not as frequent and cruel, were continued, but with this difference, that those who committed them justified them on the ground of usefulness to men.  It was this false justification of violence that Christ arraigned.  He showed that, since every act of violence could be justified as actually happens, when two enemies do violence to one another and both consider their violence justifiable, and there is no chance of verifying the justice of the determination of either, it is necessary not to believe in any justifications of violence, and under no condition, as at first was thought right by humanity, is it necessary to make use of them.

이것은 어째서 그렇습니까? 사람들은, 유린하고 살인하는 것이 그들에게 유익한 모든 사람들을 유린하며, 그리고 심지어는 서로를 잡아 먹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면서 서로를 잡아 먹으면서, 짐승 같은 삶을 살아오곤 했습니다. 그런데, 때가 왔으니, 수 천년 전에, 심지어 모세의 시대에, 사람들 안에서 서로를 유린하고 죽이면 나쁘다는 의식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폭력이 유익하던 일부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은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자기 자신들 및 다른 사람들에게 유린하고 살인하는 것이 언제나 나쁜 것은 아니며, 이것이 필요하며, 유익하고 심지어 선한 경우들도 있다고 확신시켜 주었습니다. 그리고 폭력 및 살인 행위들은, 비록 그처럼 잦거나 잔학하지는 않았더라도, 계속되었으나, 이와 같은 차이가 있었습니다, 즉 그것들을 범한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유익하다는 근거로 그것들을 정당화시킨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가 규탄한 것은 이와 같은 폭력에 대한 거짓된 정당화입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폭력 행위는 실제로 발생되면서 정당화될 수 있으며, 두 원수들이 서로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그들의 폭력이 정당하다고 여기며, 양 쪽의 결정에 대한 정당성을 확인할 기회가 없기 때문에, 폭력에 대한 어떠한 정당화도,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믿지 않는 것이 필요하며, 애초에 인류에 의해서 생각되었던 대로, 그것들을 이용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It would seem that men who profess Christianity would have carefully to unveil this deception, because in the unveiling of this deception does one of the chief manifestations of Christianity consist.  But the very opposite has happened:  men to whom violence was advantageous, and who did not want to give up these advantages, took upon themselves the exclusive propaganda of Christianity, and, preaching it, asserted that, since there are cases in which the non-application of violence produces more evil than its application (the imaginary robber who kills the child), we must not fully accept Christ's teaching about non-resistance to evil, and that we may depart from this teaching in the defence of our lives and of those of other men, in the defense of our country, the protection of society from madmen and malefactors, and in many other cases.  But the decision of the question as to when Christ's teaching ought to be set aside was left to those very men who made use of violence.  Thus Christ's teaching about non-resistance to evil turned out to be absolutely set aside, and, what is worse than all that, those very men whom Christ arraigned began to consider themselves the exclusive preachers and expounders of His teaching.  But the light shineth in the dark, and the false preachers of Christianity are again arraigned by His teaching.

그리스도교를 고백하는 사람들이, 이런 기만을 벗겨내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최고로 중요한 표명들 중의 하나가 되기 때문에, 이런 기만을 조심스럽게 벗겨 내었을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정반대가 발생했습니다: 폭력이 유익하며, 이와 같은 이익들을 포기하기를 원치 않는 사람들은, 스스로 그리스도교에 대한 배타적 전파를 맡았으며, 그것을 설교하고,  폭력을 적용하지 않음이 그 적용보다 더한 악을 만들어 내는 경우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악에 대한 무저항에 관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완전히 수용하면 안 되는 것이며, 우리는, 우리의 목숨들과 다른 사람들의 목숨들을 방어함에서, 우리의 국가의 방어, 미친 사람들과 악인들로부터 사회를 보호함에서, 그리고 다른 많은 경우들에서, 이런 가르침으로부터 이탈해도 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언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제쳐놓을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의 결정은 폭력을 이용한 바로 그 사람들에게 남겨졌습니다. 그리하여 악에 대한 무저항에 관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절대적으로 팽개쳐진 것으로 밝혀졌으며, 그리스도가 규탄한 바로 그 사람들은 자기 자신들이 그분의 가르침에 대한 유일한 설교자들이며 해석가들로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빛은 어둠에서도 빛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거짓 설교자들은 다시 그분의 가르침에 의해서 규탄 받고 있습니다.

     We can think of the structure of the world as we please, we may do what is advantageous and agreeable for us to do, and use violence against people under the pretext of doing good to men, but it is absolutely impossible to assert that, in doing so, we are professing Christ's teaching, because Christ arraigned that very deception.  The truth will sooner or later be made manifest, and will arraign the deceivers, even as it does now.

우리는 세상의 구조를 우리 마음대로 생각할 수 있으며, 우리가 행하기에 유익하며 구미에 맞는 것을 행할 수 있으며, 사람들에게 선을 행한다는 구실 아래서 사람들에게 폭력을 사용할 수 있지만, 그렇게 행함으로써,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고백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바로 그와 같은 기만을 규탄하였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조만간 명백히 드러날 것이며, 기만하는 자들을 규탄할 것이며, 그것은 심지어 지금 일어나고 있습니다.

     Let only the question of the human life be put correctly, as it was put by Christ, and not as it was corrupted by the churches, and all the deceptions which by the churches have been heaped on Christ's teaching will fall of their own accord.

사람의 삶의 문제만이라도, 그리스도에 의해서 깨달아졌던 것처럼, 그리고 교회에 의하여 부패되었던 것 같이가 아니라,  올바르게 깨달아진다면, 그러면 그리스도의 가르침 위에 교회들에 의해서 쌓여졌던 모든 기만들이 자연히 무너져 내릴 것입니다.

     The question is not whether it will be good or bad for human society to follow the law of love and the resulting law of non- resistance, but whether you -- a being that lives today and is dying by degrees tomorrow and every moment -- will now, this very minute, fully do the will of Him who sent you and clearly expressed it in tradition and in your reason and heart, or whether you want to act contrary to this will.  As soon as the question is put in this form, there will be but one answer:  I want at once, this very minute, without any delay, without waiting for anyone, and without considering the seeming consequences, with all my strength to fulfil what alone I am indubitably commanded to do by Him who sent me into the world, and in no case, under no condition, will I, can I, do what is contrary to it, because in this lies the only possibility of my rational, unwretched life.

문제는, 인간 사회가 사랑의 법과 그로부터 초래되는 무저항의 법을 따르는 것이 선인지 악인지가 아니라, 당신이 - 오늘 살아 있으며 내일 그리고 매 순간에 조금씩 죽어 가고 있는 한 존재로서 - 이제는, 바로 이 순간에, 당신을 보내셨으며, 전승 안에 그리고 당신의 이성과 마음 안에 표명하였던 그분의 뜻을 온전히 행할 것인지, 아니면 당신이 이 같은 의지에 반대되는 행위를 원하는가인 것입니다. 문제가 이런 모습으로 놓이게 되면, 한가지 대답이 제시될 것입니다: 나는, 당장, 바로 이 순간에,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누구를 기다리지 않고, 그리고 외관상 결과들을 고려하지 않고, 나의 모든 힘을 다하여, 나를 세상에 보내신 그분에 의해서 내가 의혹의 여지 없이 행할 것을 명령 받은 것을 성취할 것을 원하며,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어떤 상황에서도, 나는 그것에 반대되는 것을 행하지도 행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 안에 오직 나의 합리적인, 행복한 삶이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January 12, 1896.

1896년 1월 12일

 
Crosby, Earnest Howard (1856-1907)
b. in New York City, was a social reformer and author, founder and first president of Social Reform Club, a vegeterian, single taxer, and antimilitarist.
어느스트 하워드 크로스비(1856-1907)
뉴욕 출생, 사회 개혁가 및 작가, [사회 개혁 클럽]의 창시자이며 초기 회장, 채식주의자, 단일세 주의자, 및 반제국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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