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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DUCTION TO 
AN EXAMINATION OF THE GOSPELS


복음서 연구에 대한 서문

   

HAVING by reason been brought to despair and a negation of life, I looked around on living people and became convinced that such despair is not the common lot of mankind, but that men have lived, and do live, by faith.

이성에 의해서 절망과 삶의 부정에 다가간 다음, 나는 살아 있는 사람들을 둘러 보았다 그리고 그런 절망은 인류의 공통의 운명이 아니라, 사람들은, 신앙으로서, 살아 왔으며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I saw around me men who had that faith and drew a meaning of life from it which gave them strength to live and die peacefully and joyfully, but my reason could not explain that meaning to me. I tried to arrange my life as those believers did, tried to unite with them, doing all that they did in life and in the external worship of God, thinking that in that way the meaning of life would disclose itself to me. The more I came together with the peasants and lived like them, practising all the external rites of divine worship, the more I became con­scious of two contradictory forces acting upon me. On the one hand I became conscious of a meaning of life that satisfied me and was not destroyed by the approach of death; while on the other hand I saw much that was false in that external profession of faith and that worship of God. I understood that the masses, from their ignorance, lack of leisure, and disinclination to think, might not see that falsehood; but I could not help seeing it, and having once seen it could not close my eyes to it, as edu­cated believers advised me to do. The longer I continued to fulfill the obligations of a believer the more did that falsity startle me and demand an investigation of where falsity ended and truth began; for I no longer doubted that the very truth of life was contained in the Christian teaching. My inner discord finally reached such a pitch that I could no longer intentionally close my eyes, as I had done before, but was inevitably compelled to in­vestigate the religious doctrine I wished to make my own.

나는 나의 주위에서 그런 신앙을 가졌으며 그것으로부터 평화롭게 그리고 즐겁게 살고 죽을 수 있는 힘을 주는 삶의 의미를 찾는 사람들을 보았으나, 나의 이성은 그런 의미를 내게 설명할 수 없었다. 나는, 그들이 삶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외적인 숭배에서 행했던 모든 것을 행하면서, 그런 방법으로 삶의 의미 스스로 내게 밝혀 질 것이라고 믿으면서, 나의 신자들이 행한 것처럼 나의 삶을 정리하려고 시도하였고, 그들과 함께 묶어 보려고 하였다. 신의 숭배에 대한 모든 외적인 의식들을 실행하면서, 내가 농부들과 함께하며 그들처럼 살면 살수록, 나에게 작용하는 두가지의 모순적인 힘들을 느끼게 되었다. 한편으로 나를 만족시켜주는 삶의 의미를 의식하게 되었고, 다른 한편으로 신앙과 하나님의 숭배에 대한 외적인 고백에서 거짓인 많은 것을 보았다. 대중들은, 그들의 무지, 여가의 부족, 그리고 생각에 대한 싫증으로, 그런 거짓을 볼 수 없었지만, 나는 그것을 보지 않을 수가 없었고, 그것을 한 번 보고 나서는, 교육 받은 신자들이 내게 충고하는 것처럼, 그것에 대해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나는 신자의 의무들을 계속해서 이행하면 할수록 그런 거짓이 나를 놀라게 하였고 어디서 거짓이 끝났고 진리가 시작되었는지 조사를 요구하였다; 그 이유는 나는 삶의 진리 자체가 기독교적인 가르침에 들어 있다는 것을 더 이상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의 내적인 불일치는 마침내 극도에 달해서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나는 더 이상 의도적으로 눈을 감아 버릴 수가 없었고, 필연적으로 나의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종교적인 교리를 조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At first I asked priests, monks, bishops, metro­politans, and learned theologians, for explanations. Explanations of all the obscure passages were given, but these were often unscrupulous and still oftener contradictory, and they were all based on the holy fathers, the catechisms, and theology. So I took the theological books and began to study them, and that study led me to the conviction that the faith our hierarchy professes and teaches to the people is not only false but is an immoral deception.

처음에 나는 사제들, 수도승들, 주교들, 대주교들, 그리고 학식있는 신학자들에게 설명을 부탁했다. 모든 애매한 구절들에 대한 설명들이 주어졌다, 그러나 이 것들은 종종 신중하지 못하며 너무도 흔히 모순적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성부들, 교리 문답들, 그리고 신학에 기초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신학 서적들을 들고서 그것들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연구는 우리의 성직자들이 사람들에게 고백하고 가르치는 신앙은 거짓일 뿐만 아니라 비도덕적인 기만이라는 확신에 이르게 했다.

In the Orthodox doctrine I found no teaching at all about life or its meaning, but found instead the exposition of most incomprehensible, blasphemous, and shocking propositions, not merely incompatible with reason, but quite incomprehensible and con­trary to morality. And I could not help seeing that this theological exposition was evidently directed not towards explaining the meaning of life and teaching how it should be lived, but merely to asserting very incomprehensible and to me un­necessary propositions, and to the repudiation of all who do not accept those propositions. This ex­position, directed to the denial of other doctrines, involuntarily caused me to direct my attention to those other creeds, and these other disputed creeds turned out to be of the same character as the Ortho­dox teaching which refuted them. Some are more absurd, others less so, but all alike affirm incom­prehensible propositions which are useless for life, and in their name deny one another and infringe the unity of men, the chief basis of Christian teaching.

정교회의 교리에서 나는 삶이나 그것의 의미에 대한 가르침을 전혀 찾지 못한 대신, 가장 이해하기 어렵고, 모독적이며, 충격적인 주장들을 발견했는데, 그것들은 이성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너무나 이해할 수 없고 도덕과는 반대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런 신학적인 해석은 명백히 삶의 의미를 설명하고 어떻게 살아져야 하는지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매우 납득하기 어려운, 그리고 내게는 불필요한 명제들을 주장하고 있으며, 그러한 명제들을 받아 들이지 않는 모든 사람들을 배척함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음을 깨닫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런 해석은, 다른 교리들의 부정에 주안점을 두고 있어서, 나도 모르게 나의 관심을 다른 교리들로 시선을 돌리게 만들었고, 이런 다른 논란을 주는 교리들도 그것들을 반박하는 정통교회의 가르침과 똑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어떤 것들은 더욱 얼토당토 않은 것이며 다른 것들은 조금 덜했다, 그러나 모두가 마찬가지로 삶에 무익한 이해할 수 없는 명제들을 주장하고, 그것들의 이름으로 서로를 부정하고, 기독교 가르침의 가장 기초인, 사람들의 연합을 깨트리고 있었다.

I was brought to the conviction that there is no Church at all. Christians of all denominations call themselves true Christians and repudiate the others, and each of these separate collections of Christians calls itself alone the Church, and assures us that it is the true one from which the others have separated and fallen away, and that it alone remains erect. All the believers of the different sects quite fail to see that their creed is not the true one because their faith has remained such and such, but that they call it true because they were born into it or have adopted it, and that the others say just the same about their creeds. So it is evident that there never has been some one Church, that the Church is not one, or two, but two thousand, and that each denies all the others and asserts that it alone is the true and only Church. Each of them says one and the same thing; 'Ours is the True, Holy, Catholic, Apostolic, and Universal Church. Our Scripture is sacred and our traditions are sacred. Jesus Christ is the Head of our Church and the Holy Ghost guides it, and it alone comes by direct succession from Christ-that is from God.'

나는 교회는 전혀 없다는 확신에 이르렀다. 모든 종파의 기독교인들은 스스로를 진정한 기독교인들이라고 부르며 다른 사람들을 부정한다, 그리고 이들 별개의 기독교인들의 집합들의 각각을 자신들 만이 교회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것이 유일한 것이며 다른 것들은 분리되어 떨어져 나갔으며, 그것 만이 곧은 것이라고 단언한다. 상이한 종파들의 모든 신자들은 그들의 신앙이 그렇고 그렇게 지속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교리가 진리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이 그것으로 태어났거나 그것을 채택하였고,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교리에 대해서 똑 같이 말하기 때문에 그것을 진실하다고 부른다. 그래서 결코 어떤 유일한 교회가 있은 적이 없으며, 교회는 하나 또는 둘이 아니라, 수천 개이며, 각각은 모든 다른 것을 부정하고 오직 자신 만이 유일한 진리이며 유일한 교회라고 주장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들 각자는 하나이자 똑 같은 것을 말한다: ‘우리의 교회는 진리의, 성스러운, 보편적인, 사도의 그리고 전 세계의 교회이다. 우리의 성서는 성스럽고 우리의 전통들은 성스럽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교회의 머리이며 성령이 그것을 인도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 만이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연결되어 나온다.’

If one takes any twig of a spreading bush it will be quite correct to say that from twig to branch, and from branch to limb, and from limb to trunk, every part is derived from the root, but none of them is exclusively so derived. To say of any particular twig that it is the only true twig would be absurd. Yet that is just what is said by the Churches.

만일 누군가 펼쳐진 덤불에서 어떤 작은 가지를 잡는다면, 곁가지에서 가지로, 가지에서 큰 가지로, 큰 가지에서 둥치로, 모든 부분이 뿌리에서 나온 것이며 그들 중 어느 것도 유일하게 그곳에서 나오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 매우 온당할 것이다. 어느 특정한 가지만이 유일하게 진짜 가지라고 말함을 모순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교회들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Indeed there are a thousand traditions and each denies and curses the others and regards its own as the true one: Catholics, Lutherans, Protestants, Calvinists, Shakers, Mormons, Orthodox-Greeks, Old-Believers, the Popovtsi, the Priestless, the Molokani, the Menonites, the Baptists, the Mutila-tors, the Dukhobors, and the rest-and they all alike declare that their own faith is the only true one, that in it alone is the Holy Spirit present, that its head is Christ, and that all the others are in error. There are a thousand faiths, and each calmly considers itself alone holy. And they all know this and each man who declares his faith to be the only true one knows that another faith quite similarly regards itself as true and all the others as heresies. And for nearly eighteen hundred years this self. delusion has been and still is going on.

사실 수천 가지의 전통들이 있으며 각자는 다른 것들을 부정하고 저주하며 자기 자신만을 진정한 것으로 여긴다: 카톨릭, 개신교, 칼빈주의, 쉐이커교, 그리스 정통교, 구교도, 포포브치, 무사제, 몰로카니, 메노나이트, 침례교, 절단교, 듀크호보, 그리고 나머지들-그리고 그들 모두는 자신들의 신앙이 유일한 진리이며, 오직 그 안에서 만 성령이 함께하며, 그의 머리는 그리스도이며, 다른 모든 것들은 오류에 빠진 것이다라고 선언한다. 수천 가지의 신앙들이 있다, 그리고 각자는 조용히 자신이 오직 성스럽다고 여긴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이것을 알고 있으며 자신의 신앙이 유일한 진리라고 선언하는 각기 사람은 다른 신앙도 매우 유사하게 자신들이 진리이며 모든 다른 것들은 이단들로 여긴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거의 1800년 동안 이런 자기 기만은 있어 왔으며,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In worldly matters men know how to detect and avoid most ingenious pitfalls, but millions of men have lived for eighteen hundred years in this de­ception, shutting their eyes to it, and in our Euro­pean world and in America (where everything is done in a new way) everybody as if by agreement repeats one and the same stupid deception: each professing his own faith, considering it to be the only true one, and not noticing that people of all the other creeds are doing exactly the same.

세상 문제에 있어서 사람들은 가장 솔직한 위험들을 찾아 내서 피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그러나 수백만의 사람들은 1800년 동안 이런 기만 속에 살아 왔으며, 그것에 그것에 대해서 눈을 닫고서, 우리의 유럽 세계와 아메리카에서(그곳에서는 모든 것이 새로운 방법으로 행해진다) 모두가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한가지로 똑 같은 우둔한 기만을 반복한다: 제각기 자기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그것을 유일한 진리의 것으로 여기며, 다른 모든 교리들을 가진 사람들도 정확히 똑 같이 행하고 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

Yet free-thinkers ridiculed this stupidity acutely and cleverly long long ago, and clearly showed how inane it is. They clearly showed that this whole Christian teaching with all its ramifications has long since outlived its day and that the time has come for a new faith, and some of them have even invented new faiths, but nobody listens to them or follows them, and people all continue each to be­lieve in his own special Christian faith as before; the Catholics theirs, the Lutherans theirs, our sec-tarian-Popovtsi theirs, the Priestless theirs, the Mormons theirs, the Molokans theirs, and the Orthodox Russo-Greeks (whom I wished to join) theirs.

그러나 자유 사상가들은 이런 우둔함을 신랄하고 영리하게 오래 오래 전에 비웃었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명백하게 보여주었다. 그 모든 가지들을 가진 이런 전체 기독교의 가르침은 오래 전에 그 시대에 맞지 않게 낡아 버렸으며 새로운 신앙을 위한 시대가 왔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 주었다, 그리고 그들 중의 몇몇은 새로운 신앙들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들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거나 그들을 추종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람들은 모두 각자가 계속해서 이전처럼 자기 자신의 특별한 기독교 신앙을 믿고 있다: 카톨릭은 그들의 것을, 무사제교도 그들의 것을, 모르몬교도 그들의 것을 , 몰로카도 그들의 것을, 그리고 정통 러시아 정교회(나는 그것에 참여하기를 희망했었다)도 그들의 것을 믿는다.

What does this mean? Why do men not abandon that teaching? The one answer-in which the free­thinkers who reject religion and all men of other religions agree-is that Christ's teaching is good, and therefore so precious to people that they cannot live without it. But why have these men who believe in Christ's teaching all divided into different sects, and why do they still continue to divide up more and more, denying and condemning one another, and why are they unable to unite in one faith? Again the answer is simple and obvious.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람들은 왜 그런 가르침을 버리지 않는가? 한가지 대답-종교를 거부하는 자유 사상가들과 다른 종교를 가진 모든 사람들이 동의 하는 것에-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훌륭하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너무나 소중해서 그들은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믿는 이 사람들은 모두 서로 다른 종파들로 갈라졌으며, 아직도 여전히 계속해서 점점 더 갈라지면서, 서로를 부정하고 비난하고 있으며, 왜 그들은 하나의 신앙으로 연합할 수 없는가? 다시 그 대답은 단순하고 명백하다.

The cause of the division among Christians is simply this teaching about the Church, a teaching which asserts that Christ established a single true Church which is in its essence holy and infallible and can and must teach others. Were it not for this conception of ‘the Church’, such division among Christians could not exist.

기독교인들 사이의 분열의 원인은 단순히 교회에 관한 이런 가르침, 즉 그리스도는 단 하나의 진정한 교회를 세웠으며 그것만이 본질에 있어서 성스럽고 무류이며,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고 그렇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가르침이다. ‘교회’에 대한 이런 개념만 아니라면, 기독교인들 사이의 그런 분열은 존재할 수 없다.

Each Christian Church, that is, each of the religious doctrines, indubitably derives from the teaching of Jesus himself but is not the only one that derives from it: all the other doctrines derive from it too. They have all grown from one seed, and what unites them and is common to them all is that from which they grew-the seed. And there­fore to understand the teaching of Jesus rightly we should not examine it from branch to trunk, as each separate sect does, nor need we examine it from its foundation, proceeding from trunk to branches, as is equally uselessly done by science-the history of religion. Neither the one nor the other gives us the meaning of the teaching. Its meaning is only to be found by knowing the seed of the fruit from which they have all come and for the sake of which they all exist. They have all come from the life and works of Jesus, and they all exist to perform the works of Jesus, that is, to do good. And only in these works can they unite.

제각기 기독교 교회는, 즉, 종교적 교리 각각은, 의심할 바 없이 예수 자신의 가르침으로부터 유래되지만 그것으로부터 유래되는 유일한 것은 아니다: 다른 모든 교리들도 역시 그것으로부터 유래된다. 그들은 모두 하나의 씨앗에서 자라나왔다, 그리고 그들을 연결하여 주고 그들 모두에게 공통인 것은 그것-그 씨앗-으로부터 그들이 자라 나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므로 예수의 가르침을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우리는, 제각기 분열된 종파가 그러하듯이, 그것을 가지나 줄기에서 연구해서는 안 되며, 과학-종교의 역사-에 의해서 무익하게도 비슷하게 행해지듯이, 둥치에서부터 가지들에 이르는 교회들의 설립부터 연구해서도 안 된다. 전자든 후자든 우리에게 가르침의 의미를 주지 않는다. 그 의미는 오직 모든 것이 연유되었으며 그로 인해서 그들 모두가 존재하는 열매의 씨앗을 앎으로써 찾아질 수 있다. 그들은 모두 예수의 삶과 행위들로부터 나왔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예수의 행위들을 수행하기 위해서, 즉, 선을 행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그리고 오직 이런 행위들에서 그들은 연합할 수 있다.

It was search for the meaning of life, that is, search for a path of life-to know how to live-that brought me to belief, and when I had seen the life of men who adopted Christ's teaching I clung to them. Such men, who professed Christ's teaching by their works, I encountered equally and indis­criminately among the Orthodox Russo-Greeks, the different sects of dissenters, and the Catholics and Lutherans, so that evidently the general sense of life given by Christ's teaching was drawn not from the creeds but from something else that is common to all the communities. I watched good people of more than one faith, and observed in them all the same understanding based on the teaching of Jesus. In all these different sects of Christians I saw full agreement in the conception of what is good and evil and as to how one ought to live. And all these people explained this con­ception of theirs by the teaching of Jesus. The doctrines had divided them, but the basis was one and the same; therefore it is what lies at the basis of all the faiths that alone is true. And just this truth is what I now seek to learn. The truth of the faith must lie not in separate interpretations of Christ's revelation-those interpretations which have divided Christians into a thousand sects-but in the primary revelation of Christ himself. That revelation-the words of Christ himself-is in the Gospels. And so I turned to the study of the Gospels.

나를 믿음으로 이끈 것은 바로 삶의 의미에 대한 탐구, 즉, 삶의 길에 대한 탐구-어떻게 살 것인가를 아는 것-였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채택한 사람들의 삶을 보았을 때 나는 그들에게 매달렸다. 그런 사람들을, 그들은 그들의 행위들로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고백했는데, 나는 공평하게 그리고 차별 없이 러시아 정교회, 비국교도들의 다른 종파들에서, 그리고 카톨릭과 루터교 사이에서 만났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의해서 주어지는 삶의 일반적 의미가 그들의 교리들로부터가 아니라 그 모든 공동체들에 공통인 다른 어떤 것으로부터 명백히 도출되었다. 나는 한 가지 이상의 신앙에서 선한 사람들을 보았다, 그리고 그들 안에서 예수의 가르침을 기초로하는 똑 같은 깨달음을 발견하였다. 기독교인들의 이 모든 상이한 종파에서 무엇이 선이며 악인가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개념에 대한 완전한 일치를 보았다. 그리고 이 모든 사람들은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서 그들 자신의 개념으로 설명하였다. 교리들이 그들을 갈라 놓았다, 그러나 뿌리는 하나이며 똑같았다; 그러므로 유일하게 진리인 것은 모든 신앙들의 뿌리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진리가 내가 지금 알고자 추구하는 것이다. 신앙의 진리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계시를 제각기 달리 해석함-기독교인들을 수천의 종파들로 갈라 놓은 그런 해석들-에 있어서는 안 되며. 그리스도 자신의 근원적인 계시에 있어야 한다. 그러한 계시-그리스도 자신의 말씀-는 복음서 안에 있다. 그리고 그래서 나는 복음서들의 연구로 들어섰다.

I know that according to Church doctrine the meaning of this teaching is not to be found in the Gospels alone, but in the whole of the Scriptures and Traditions guarded by the Church. I assume that after what has already been said, this sophistry -to the effect that the scriptures which I am taking as the basis of my commentary are not subject to investigation because the right to interpret them belongs exclusively to the Church-cannot be repeated, especially as each interpretation is cancelled by the contrary interpretation of another Church; all the holy churches reject one another. This prohibition to read and understand the scriptures for oneself is merely an indication of the Church's consciousness of its own errors of interpretation.

교회의 교리에 따르면 이런 가르침의 의미는 복음서들 안에서 만이 아니라, 교회가 관심을 가지는 성서들과 전통들 전체에서 발견될 수 있다. 나는 이미 언급한 것에 따라서, 이런 궤변은 -나의 해설서의 기초로 내가 채택하고 있는 성서들은, 그것들을 해석할 권한은 배타적으로 교회에 속하기 때문에, 조사할 필요가 없다는 효과로서-반복될 수 없으며, 특히 제각기 해석들이 다른 교회의 대치되는 해석으로 무효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성스러운 교회들은 서로를 배척한다. 개인들이 성서들을 읽고 이해하는 것에 대한 이런 금지는 단순히 교회 자신이 해석상의 오류들을 의식하고 있음에 대한 표시이다.

God revealed truth to men. I am a man and so am not only entitled but am under obligation to make use of it and face it directly without inter­mediaries. If God speaks in these books He also knows the weakness of my mind, and will speak so as not to lead me into deception. The argument of the Church that it cannot allow individuals to interpret the Scriptures lest they should err and separate into many sects, can have no importance for me. It might have significance if the Church's interpretation were intelligible and there were but one Church and one interpretation; but now since the Church's interpretation-of the son of God, of a God in three persons, of a virgin who bore a child without infringing her virginity, of the body and blood of God which is eaten in the form of bread, and so on-cannot find place in a sane head, and since it is not one interpretation but a thousand, that argument, however often repeated, has no validity. On the contrary, an interpretation is needed, and one that all may agree to. But for this the interpretation must be reasonable. Despite our differences we all agree only on what is reason­able. If this revelation of the Scriptures is the truth, it should not and must not fear the light of reason- to be convincing it should welcome it. If the whole revelation turns out to be an absurdity, so much the better-and God be with it! 'All is possible to God'-that is true, but He cannot talk nonsense. And to write a revelation which cannot be understood would be stupid.

하나님은 진리를 모든 사람들에게 밝히셨다. 나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러므로 중개자들 없이 직접 진리를 이용하고 직면할 수 있도록 할 자격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의무를 지고 있다. 만일 하나님이 이들 책 안에서 말씀하신다면, 그분은 또한 나의 마음의 연약함을 알고 있으며, 내가 기만으로 인도되지 않도록 말씀하실 것이다. 그들이 오류를 범하여서 많은 종파들로 갈라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교회는 개인들이 성서들을 해석하도록 허용할 수 없다는 교회의 논리는 나에게 중요하지 않다. 만일 교회의 해석이 이해될 수 있으며, 하나의 교회와 하나의 해석만 있다면 그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지금 교회의 해석-하나님의 아들에 대해서, 삼위 일체의 하나님에 대해서, 처녀성을 범하지 않고 아이를 잉태한 처녀에 대하여, 빵의 형태로서 먹는 하나님의 몸과 피에 대해서, 등등- 은 제정신을 가진 머리 안에 자리를 찾을 수 없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은 하나가 아니라 수천의 해석이기 때문에, 그런 논리는, 아무리 반복하더라도, 어떠한 정당함도 가지지 못한다. 반대로, 한가지 해석, 즉 모든 사람들이 동의할 수 있는 하나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 해석은 반드시 이성적이어야 한다. 우리의 차이들에도 불구하고 오직 이성적인 것에 우리는 모두 동의한다. 만일 성서들의 이런 계시가 진리라면, 이성의 빛을 두려워 해서도, 두려워 할 필요도 없다-그것을 확신한다면 그것을 환영해야 한다. 만일 전체 계시가 부조리라면, 그럴수록 더 좋다-그리고 하나님이 그것과 함께 하리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그것은 진리이다, 그러나 그분은 허튼 말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해될 수 없는 계시를 기록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I call revelation that which opens out to us, when reason has reached its utmost limits, the contemplation of what is divine, that is, of truth that is superior to our reason. I call revelation that which gives an answer to the question, insoluble by reason which brought me to despair and almost to suicide-the question: What meaning has my life? That answer must be intelligible and must not contradict the laws of reason as would, for instance, the asser­tion that an infinite number is odd or even. It must not contradict reason, for I shall not believe an answer that does so, and it must be intelligible and not arbitrarily assumed, but inevitable to one's reason as, for instance, a recognition of infinity is to any man who is able to count. The answer must reply to the question: What meaning has my life? A reply that does not answer that question is useless to me. The answer must be such that though its essence may be incomprehensible in itself (as is the essence of God) all the deductions derived from its consequences should correspond to every demand of reason, and the meaning it ascribes to my life should solve all my questions as to how to live. The answer must be not merely reasonable and clear but also true, that is, such as I can believe in with my whole soul inevitably, as I believe in the exis­tence of infinity.

이성이 그 궁극적인 한계, 신성한 것에 대한, 즉, 우리의 이성보다 우월한 진리에 대한 묵상에 다다랐을 때에, 나는 계시를 우리에게 활짝 열려 있는 것이라고 부른다. 나는 계시를, 나를 절망으로 그리고 거의 자살-그 질문은: 나의 삶은 무슨 의미를 가지는가?이다-로 몰고 간 이성에 의해서 풀 수 없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주는 것이라고 부른다. 그 대답은 반드시 이해될 수 있어야 하며, 예를 들면, 무한한 수는 홀수이거나 짝수이다 처럼, 이성의 법칙과 모순되지 않아야 한다.. 그것은 반드시 이성과 모순되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나는 그러한 대답을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반드시 이해될 수 있어야 하며 임의적으로 가정되지 말아야 하지만, 예를 들면, 무한의 인식이 수를 셀 수 있는 어느 사람에 대한 것처럼, 자신의 이성에 대해 피할 수 없어야 한다. 그 대답은 반드시 다음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나의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 대답은 나에게 쓸모가 없다. 그 대답은 반드시 그러해서 비록 그것의 본질이 그 자체로서는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하나님의 본질처럼) 그것의 결과들로부터 도출되는 모든 추론들은 반드시 이성의 모든 요구에 일치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삶으로 돌리는 의미는 반드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나의 모든 질문들을 해결하여야 한다. 대답은 반드시 이성적이어야 할 뿐만 아니라 진리이어야 한다, 즉, 내가 무한한 존재를 믿을 때에, 내가 나의 전체 영혼으로서 믿을 수 있는 것처럼.

Revelation cannot be based on faith as the Church understands it-that is, as trust in some­thing that will be told me later. Real faith results from the inevitability and truth of a revelation that fully satisfies reason. In the Church's concep­tion, faith is an obligation imposed on man's soul by threats and enticements. In my conception it is simply this: that the foundation from which every action of my reason springs is true. Faith is a knowledge of the revelation without which it is impossible to live or think. Revelation is a know­ledge of that to which man cannot attain by reason, but which is produced by all humanity from the source of all things hidden in infinity. Such in my opinion must be the nature of a revelation that produces faith, and such I seek in the tradition about Christ, and so I address myself to it in the strictest and most rational terms.

계시는 교회가 이해하는 것처럼-즉, 후에 나에게 말해질 어떤 것을 믿듯이-신앙에 기초 되어 질 수가 없다. 진정한 신앙은 이성을 완전히 만족시키는 계시의 불가피성과 진리로부터 나온다. 교회의 개념에서, 신앙은 협박들과 유혹들로서 사람들의 영혼에 강요하는 의무이다. 나의 개념에서 그것은 단순히 이렇다: 나의 이성의 모든 행동이 솟아나는 토대는 진리이다. 신앙은 계시에 관한 지식으로 계시가 없다면 살아가고 생각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계시는 사람이 이성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것에 대한 지식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류에 의해서 무한히 숨겨져 있는 모든 것들의 근원으로부터 만들어진 것이다. 나의 의견에서 그런 것이 반드시 신앙을 만들어 내는 계시의 본질이어야 한다, 그리고 나는 그리스도에 관한 전통에서 그러한 것을 추구한다, 그리고 그러하므로 나는 가장 엄격하고 가장 이성적인 용어로서 그것을 말한다.

I do not consider the Old Testament, for the question is not what was the faith of the Jews, but in what does the faith of Christ consist, in which men find the meaning that makes it possible for them to live? The Hebrew books may be interest­ing as explaining the forms in which Christianity has been expressed, but we cannot recognize a continuity of faith from Adam to our times, for the faith of the Jews, before Christ, was local. The faith of the Jews, foreign to us, is interesting to us as is, for instance, the faith of the Brahmins. But the faith of Christ is the one by which we live. To study the faith of the Jews in order to understand the Christian faith is like studying a candle before it is lit, in order to understand the significance of the light which comes from a burning candle. The one thing that can be said is that the nature and quality of the light may depend on the candle, just as the form of expression in the New Testament may depend on its relation to Judaism, but the light cannot be explained by the fact that it proceeds from this and not from that candle.

나는 구약 성서를 고려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의문은 유태인들의 신앙이 무엇인가?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앙은 무엇으로 구성되는가?, 그리고 어디에서 사람들을 살아가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의미를 발견하는가?이기 때문이다. 히브리어 서적들은 기독교가 표현되는 형태를 설명함으로써 흥미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담에서부터 우리의 시대까지 신앙의 연속성을 인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유태인들의 신앙은, 그리스도 이전에, 지역적이었다. 유태인들의 신앙은, 우리에게 이질적이다, 예를 들면, 브라만들의 신앙처럼 우리에게 흥미를 줄 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신앙은 우리가 그것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을 이해하기 위해서 유태인들의 신앙을 연구한다는 것은, 타들어 가는 촛불에서 나오는 빛의 강도를 이해하기 위해서, 마치 초가 켜지기 전에 초를 연구하는 것과 같다. 말할 수 있는 단 한 가지는 빛의 본질과 성질은 초에 의존하며, 신약 성서에서의 표현의 형태가 유대교에 대한 관계에 의존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빛이 이쪽의 초로부터 진행하며 저쪽의 초로부터 진행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의해서 빛이 설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And so the mistake the Church makes in regard­ing the Old Testament as a scripture equally divinely inspired with the New Testament, is reflected in the most obvious way by the fact that, having recognized this in words, the Church does not actually so regard it, but has lapsed into contra­dictions from which she could never extract herself if she considered sound sense in any way obligatory on her.

그리고 그러므로 교회가 구약 성서를 신약 성서처럼 똑같이 하나님의 영감이 깃든 성서로 여김으로써 범한 잘못은, 교회는 사실상 그것을 그렇게 여기지 않지만, 이것을 말씀들로서 인정함으로써, 만일 교회가 어쨌든 교회에 의무가 되는 적절한 의미를 고려하였다면 교회가 결코 스스로 빠져 나올 수 없는 모순들로 빠져 들었다는 사실에 의해서 가장 명백한 방법으로 반영된다.

And so I leave the books of the Old Testament and treat of the written revelation (as the Church calls it) in the twenty-seven books of the New Testa­ment. But in reality the tradition is not expressed in twenty-seven books, or in five, or in a hundred and thirty-eight, for God's revelation cannot be expressed in a number of pages and letters. To say that the revelation of God is expressed by a hundred and eighty-five sheets of writing on paper, is the same as to say that the soul of such and such a man weighs five hundredweight or that the light from a lamp measures seven bushels. The revelation was expressed in men's souls, and they transmitted it to one another and wrote some of it down. Of all that was written, it is known that there were more than a hundred Gospels and Epistles not accepted by the Church, which selected twenty-seven books only and called them canonical. But evidently some books expressed the tradition better and some worse, and there was no definite line dividing the one from the other. The Church had to draw a line somewhere herself, to separate what she should acknowledge as divinely inspired, and obviously it could nowhere sharply divide complete truth from complete falsehood. The tradition was like a shade between white and black or between true and false, and no matter where the line might be drawn it was impossible to get pure white. So the Church drew that line, sorting out the various traditions and calling some books canonical and others apochryphal; and it is remarkable how well she did it. She chose so well that the most recent investigations have shown nothing that should be added, and have made it clear that all that was known and was best was included by the Church in the canonical books. More than that, as if to correct the inevitable error made in drawing that line, the Church has accepted some traditions from the Apocryphal books.

그리고 그러므로 나는 구약 성서의 책들과 신약 성서의 스물 일곱 권의 책들에 있는 성문 계시(교회는 그것을 일컫는 것처럼)의 취급을 배제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스물 일곱 권의 책에, 또는 다섯 권, 또는 일백 삼십 팔 권에는 전통이 표현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계시는 일정한 숫자의 페이지들과 서신들에 표현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계시가 종이 위에 일백 팔십 오장의 기록으로 표현된다고 말하는 것은, 그렇고 그런 사람의 영혼은 오백의 무게가 나간다거나 또는 한 등으로부터 나오는 빛은 서른 여섯 되에 달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계시는 사람들의 영혼에 표현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주었으며 그것의 일부를 기록하였다. 기록된 모든 것들 중에는, 알려지기로 교회에 의해서 채택되지 않은 백가지 이상의 복음서들과 서한들이 있으며, 교회는 스물 일곱 권만을 선별하여 정경 (正經)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분명히 어떤 책들은 전통을 더욱 훌륭히 어떤 것들은 더 형편없이 표현하였다, 그리고 전자와 후자를 구분하는 어떤 확정적인 선이 없다. 교회 자신은 어딘가에 선을 그어야 했다, 교회가 하나님께 영감 받았다고 인정해야 할 것을 구분하기 위해서, 그리고 분명히 그것은 어디에서도 완전한 진리를 완전한 거짓으로부터 예리하게 갈라놓을 수가 없었다. 전통은 백과 흑, 또는 진리와 거짓 사이의 그늘과 같았다, 그리고 어디에다 선이 그어지든지 순수한 흰색을 얻기는 불가능했다. 그렇게 교회는 그런 선을 그었다, 다양한 전통들을 정리하고 어떤 책들을 정경이라고 부르고 다른 것들은 비정경이라 불렀다; 그리고 교회가 그것을 얼마나 훌륭하게 수행했는지는 놀라운 일이다. 교회는 너무나 훌륭히 골라내었으므로 가장 최근의 연구들에 따르면 아무것도 추가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그리고 알려진 바 가장 좋은 것들은 교회가 정경서 들에 포함하였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그것 뿐만 아니라, 그러한 선을 그음에 있어서 발생한 피할 수 없는 오류를 교정하기라도 하려는 듯이, 교회는 비정경서 들로부터 약간의 전통들을 인정하였다.

All that could be done was done excellently. But in drawing that line the Church made one grave error. To reject more emphatically the books she did not accept, and to give more weight to those she did accept, she put one general seal of infallibility on all that she approved: it all proceeded from the Holy Ghost and every word was true. By this she ruined and harmed all that she accepted, for having accepted in that stripe of tradition the white, the less white, and the gray-that is, the more or less pure teaching-and having stamped it all with a seal of infallibility, she deprived herself of the right to combine, exclude, and elucidate what was accepted, which it was her duty to do but which she has not done and is not doing. It is all holy: the miracles, the Acts of the Apostles, Paul's advice about wine, the ravings of the Apocalypse, and all the rest. So that though these books have existed for eighteen hundred years they still lie before us in the same rough, awkward, contradictory form, full of absurdities, in which they have ever been. Assuming that every word of the Scriptures was true and holy, the Church tried to combine, eluci­date, disentangle, and understand the contradic­tions; and she did all that could be done in that direction, that is, she gave as much sense as possible to what was absurd. But the first mistake was fatal. Having acknowledged it all as sacred truth it was necessary to justify everything, to shut one's eyes, to hide, to manipulate, to fall into contradictions and, alas, often to say what was not true. Having in words accepted everything, the Church has had in fact to reject certain books-such as the Apoca­lypse in its entirety, and parts of the Acts of the Apostles-for these often contain nothing instruc­tive and are simply scandalous.

행할 수 있는 모든 것은 훌륭하게 행해 졌다. 그러나 그러한 선을 그음에 있어서 교회는 한 가지 중대한 오류를 범했다. 교회가 받아 들이지 않는 책들을 더욱 강하게 거부하기 위해서, 그리고 교회가 받아 들인 것들에 더욱 무게를 주기 위해서, 교회는 교회가 인정한 모든 것에 무류성이라는 한 가지 보편적 봉인을 만들었다: 그 모든 것은 성령으로부터 나왔으며, 모든 말씀은 진리이다. 이렇게 하여 교회는 자신이 받아들인 모든 것을 멸망케 하고 해를 끼쳤다, 왜냐하면 그런 전통의 색깔 안에, 하얀 색, 덜 하얀 색, 그리고 회색-즉, 다소간의 순수한 가르침-을 함께 받아들이고, 그 모든 것을 무류성이라는 봉인으로 낙인 해 버렸으며, 교회는 받아 들인 것을 조합하고, 배제하며, 설명할 권리를 스스로 박탈하였으며, 그것을 행하는 것은 교회의 의무였으나 교회는 행하지 않았으며 행하지도 않고 있다. 그 모든 것은 성스럽다: 기적들, 사도들의 행위들, 포도주에 대한 바울의 권고, 계시록의 허풍들, 그리고 나머지 모든 것들도 성스럽다. 그러하므로 비록 이들 책들이 1800 년 동안 존재하여 왔지만, 그 안에서 그것들이 있어 왔던 그대로, 우리 앞에 여전히 똑 같이 거칠고, 불편하며, 모순적인 형태, 부조리들로 가득찬 체로 놓여 있다. 성서들의 모든 말씀들이 진리이며 성스럽다고 가정하면서, 교회는 그 모순들을 조합하고, 설명하며, 엉킨 것을 풀고, 이해하려고 시도했다; 그리고 그런 방향으로 행해질 수 있는 모든 것을 행하였다, 즉, 교회는 부조리인 것에 대해 가능한 많은 의미를 부여했다. 그러나 처음의 실수는 너무나 치명적이었다. 그 모든 것을 신성한 진리로 인정하였기 때문에, 모든 것을 정당화하고, 자신의 눈을 가리고, 숨기고, 조작하고, 모순으로 뛰어들고, 그리고 슬프게도, 진리가 아닌 것을 말하는 것이 필요하였다. 모든 것을 말씀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교회는 사실 특정한 책들-예를 들면 계시록을 통째로, 그리고 사도행전의 일부들-을 거부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가끔 교훈적이지 못한 것들 담고 있으며 단순히 모독적이기 때문이었다.

Evidently the miracles were written by Luke to confirm men's faith, and no doubt there were then some people who were strengthened in their faith by such reading. But now one cannot find a more blasphemous book than the Acts of the Apostles, nor one that more undermines faith. A candle may be needed in the dark, but where there is light there is no need to illuminate it with a candle, for it is seen of itself. Christ's miracles are candles brought to the light to illuminate it. If there is light it is seen of itself, and if there is no light then only the candle is seen.

분명히 기적들이 누가에 의해서 사람들의 신앙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기록되었다, 그리고 틀림없이 그 당시 그러한 것을 읽음으로써 그들의 신앙에 힘을 얻은 약간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사도행전 보다 더 신성 모독적인 책, 그리고 신앙을 약하게 만드는 것을 찾을 수 없다. 어둠에서는 촛불이 필요하다, 그러나 빛이 있는 곳에서는 촛불로서 빛을 밝힐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빛은 스스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기적들은 그것을 밝히기 위해서 빛에 가져간 촛불이었다. 만일 빛이 있다면, 그것은 스스로 보이며, 만일 빛이 없다면, 그때서야 오직 촛불이 보인다.

And so it is neither necessary nor possible to read the twenty-seven books one after another acknow­ledging every word to be true, as the Church does; for by doing this you would arrive at what the Church has arrived at, namely, self-contradiction. To understand the contents of the Scriptures belong­ing to the Christian faith it is first of all necessary to decide which of the twenty-seven books offered us as the Holy Scriptures are more, and which are less, essential and important, and then begin with the most important ones. These undoubtedly are the four Gospels. All that preceded them can for the most part only be historical material for their understanding, and all that follows is but an elucidation of them. And so it is not necessary to insist on harmonizing all the books as the Churches do. I am convinced that that, more than anything else, has led the Church to preach unintelligible things. But it is necessary to seek the chief basis of the teaching in those four books, which according to the teaching of the Church itself set forth the most essential revelation, and not to conform them to any other books. And this is not because I do not wish so to conform them, but because I fear the mistakes of the other books, of which there are such striking and evident examples.

그리고 그러므로, 교회가 그러하듯이, 모든 말씀들을 진리라고 인정하면서 스물 일곱 권의 책들을 하나씩 읽을 필요가 없으며 그것은 불가능하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렇게 행함으로써 당신은 교회가 도달한 것에, 다시 말하면, 자기 모순에 도달할 것이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앙에 속하는 성서들의 내용을 이해하려면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성서로서 제시된 스물 일곱 권 중에서 어느 것이 더욱, 그리고 어느 것이 덜 본질적이며 중요한지를 결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나서 가장 중요한 것들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이것들은 의심할 여지도 없이 사 복음서들이다. 그것들에 앞서는 모든 것들은 대부분 오직 그것들의 이해를 위한 역사적 참고서일 뿐이며, 그리고 그것들 뒤에 따르는 것들은 모두 오직 그것들의 설명서일 뿐이다. 그리고 그러므로 마치 교회가 행하듯이 모든 책들을 짜맞추려 고집할 필요가 없다. 나는 무엇보다도 먼저, 그런 자세가 교회로 하여금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설교하도록 이끌었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그들 네 권의 책들에서 가르침의 핵심적인 기초들을 구하는 것은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은 교회 자체의 가르침에 따르면 가장 중요한 계시로서 제시하고 있으며, 어떤 책들과도 일치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그렇게 그들을 일치시키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다른 책들의 오류들을 두려워 하기 때문이며, 그것들에 대해서는 너무나 놀랍고 분명한 예들이 있다.

In these books I shall seek for the following:

이 책들에서 나는 다음과 같은 것을 추구할 것이다.

1. What I can understand, for no one can believe what is unintelligible;

1.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것, 왜냐하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무도 믿지 않기 때문이다.

2. What answers the question as to what I am and what God is; and

2. 나는 무엇인가 그리고 하나님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답하는 것, 그리고

3. What is the chief and sole basis of the whole revelation.

3. 전체 계시의 핵심적이며 유일한 기초는 무엇인가.

And so I shall read incomprehensible, obscure, and semi-intelligible passages, not capriciously, but so that as far as possible they should agree with the parts that are quite clear and should lead to one basis.

그리고 그러므로 나는 이해할 수 없고, 애매하며, 그리고 조금밖에 알 수 없는 구절들을, 변덕스럽지 않으며, 가능한 한 아주 명료한 부분들과 일치하도록, 그리고 한 가지 기초에 반드시 도달하도록 읽어 나갈 것이다.

Reading both the Scriptures themselves and what has been written about them not once or twice but many times, I came to the conclusion that the whole Christian tradition is contained in the four Gospels, that the books of the Old Testament can serve only as an explanation of the form Christ's teaching took, and that this can only obscure and in no way elucidate the meaning of Christ's teaching; that the Epistles of John and James are private interpreta­tions of the teaching evoked by special occasions, and that it is sometimes possible to find Christ's teaching expressed in them from a new side, but nothing more. Unfortunately we can often find, especially in the Epistles of Paul, an expression of the teaching which is liable to involve readers in perplexity, obscuring the teaching itself. The Acts of the Apostles (like many of the Epistles of Paul) have often nothing in common with the Gospels and the Epistles of John, Peter, and James, but even contradict them. The Book of Revelation reveals absolutely nothing. But the chief thing is that the Gospels, at whatever different times writ­ten, give the exposition of the whole teaching and everything else is only an interpretation of it.

성서들 자체와 그것들에 대해서 쓰여진 것들을 한 번이나 두 번이 아니라 여러 번을 읽고서, 나는 전체 기독교의 전통이 사복음서에 담겨 있으며, 구약 성서는 오직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취하는 형태를 설명함을 도울 뿐이며, 이것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뜻을 오직 흐릴 뿐이며, 결코 밝혀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즉, 요한과 야고보의 서한들은 특별한 경우들에 의해서 야기된 가르침의 사적인 해석들이며, 새로운 관점에서 그것들 안에 표현되어 있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발견하는 것이 때로는 가능하겠지만, 그 이상은 아니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가끔씩, 특별히 바울의 서한 들에서, 독자들을 혼란으로 몰아 넣기 쉬운 가르침의 표현을 발견할 수 있으며, 그것은 가르침 자체를 흐리게 하고 있다. 사도행전은 가끔 (바울의 많은 서한들처럼) 복음서들, 요한, 베드로, 그리고 야고보의 서한들과 아무런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심지어 그것들과 모순되는 것들을 가지고 있다. 계시록은 전혀 아무것도 계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핵심적인 것은, 복음서들은, 어떤 상이한 시기들에 기록되었더라도, 전체 가르침에 대한 설명을 제시한다 그리고 기타 모든 것들은 오직 그것에 대한 해석일 뿐이다.

I read the Gospels in Greek, the language in which they have been handed down to us, and I translated them as the sense and the dictionaries demanded, digressing occasionally from the transla­tions existing in modern languages and made after the Church had comprehended and defined the meaning of the tradition in its own way. Besides translating, I was inevitably led to the necessity of harmonizing the four Gospels, as they all give an account, though variously, of the same incidents and the same teaching.

나는 복음서들을 우리에게 전해 내려온 언어인, 그리스어로 읽었으며, 때때로 현대어로 존재하는 번역본들에서 벗어나서, 그것들을 의미와 사전들이 요구하는 대로 번역하였고, 교회가 그 자신의 방법대로 전통의 의미를 이해하고 정의한 것을 추적하였다. 게다가 번역하면서, 나는 필연적으로 네 가지 복음서들을 일치시킬 필요에 이르렀으며, 그것들이, 비록 다양하지만, 똑 같은 사건들과 똑 같은 가르침에 대한 설명을 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The new exegetical proposition that John's Gospel, being exclusively theological, should be considered separately, had no importance for me as my aim is not historical, philosophical, or theological criticism, but to find the meaning of the teaching. The meaning of the teaching is expressed in all four Gospels, and so if they all four express one and the same revelation of truth they should confirm and elucidate one another. So I examined them, uniting all the Gospels into one without excluding the Gospel of John.

요한 복음은, 예외적으로 신학적이므로, 반드시 별도로 고려되어야 한다는 새로운 해석상의 전제는 나에게 중요함을 가지지 못했다, 왜냐하면 나의 목적은 역사적, 철학적 또는 신학적 비평으로서가 아니라 가르침의 의미를 발견하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가르침의 의미는 모든 사복음서에 표현된다, 그리고 그러므로 만일 네 가지 모두가 한가지를 표현하고 똑 같은 진리의 계시를 표현한다면 그것들은 서로를 설명해주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요한 복음을 배제하지 않고 사복음서 모두를 하나로 통합하면서 그것들을 연구하였다.

Many attempts have been made to unite the Gospels into one; but those known to me, by Arnolde de Vence, Farrar, Reuss, and Grechulevich, take an historical basis for their harmonizations and are all unsuccessful. Not one of them is better than another in an historical sense, and they are all equally satisfactory as regards the teaching. I leave the historical significance entirely aside and unite them only according to the meaning of the teaching. A harmonization of the Gospels on this basis has this advantage, that the true teaching represents as it were a circle, all parts of which equally determine their mutual significance, and the examination of which can begin indifferently at one or other point.

복음서들을 하나로 통합하려는 많은 시도들이 있어왔다; 그러나 나에게 알려진 것들은, 아놀드 드 벤스, 파라르, 로이스, 그리고 그레출비치에 의한 것들 처럼, 그것들의 일치들에 대한 역사적인 기준을 취하였으며 모두가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것들 중의 한 가지도 역사적인 의미에서 다른 것보다도 나은 것이 없으며, 그것들은 모두 공히 가르침에 대해서 만족하는 것이었다. 나는 역사적인 중요성을 전적으로 젖혀 두고서 그것들을 오직 가르침의 의미에 따라서 결합했다. 이런 근거로 복음서들의 일치는 이런 장점, 즉, 진정한 가르침은 마치 하나의 원처럼 모든 부분들이 똑같이 서로의 중요성을 결정하며, 그것에 대한 연구는 이 지점이나 저 지점에 상관 없이 시작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진다.

Studying the Gospel in this way, in which the historical events of Christ's life are so closely connected with the teachings, the historic sequence appeared quite indifferent and for the sequence of events it did not matter which harmonization of the Gospels I took as basis. I took the two latest harmonies, by authors who have utilized the labours of all their predecessors-Grechulevich and Reuss. But as Reuss separated John from the Synoptics, Grechulevich's harmony suited me better and I took him for the basis of my work, compared him with Reuss, and diverged from them both when the sense demanded it.

그리스도의 삶의 역사적 사건들이 가르침들과 긴밀히 관련되어 있는 안에서, 복음서를 이런 방법으로 연구함으로써, 역사적 순서는 상당히 무관해 보였으며 사건들의 순서에 대해서 복음서의 어느 일치를 내가 기초로 택하였는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들의 모든 선배들의 작업들을 활용한 저자들-그레출비치와 로이스-에 의해서 나는 가장 최근의 두 가지 일치들을 선택하였다. 그러나 로이스가 요한 복음을 사 복음서에서 제외하였기 때문에, 그레출비치의 대조가 나에게 더 적합했으며 나는 그를 나의 작업의 기초로 채택하였고, 그를 로이스와 비교하면서, 의미상 그것을 필요로 할 때는 그들 모두에서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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